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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비동의강간죄 요구 청원 법사위 회부
6개월 흘렀지만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안 돼
법사위 전반기 임기 만료까지 심사기한 연장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국회에서 사실상 계류 상태로 남게 됐다. 청원이 소관위원회로 회부된 지 6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이 제22대 국회 전반기 임기 만료일까지 심사기한이 연장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는 지난 1일 전체회의에서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요구하는 국민청원 2건을 포함한 16건의 심사기간을 오는 제22대 전반기 임기 만료일(2026년 5월)까지 연장하기로 의결했다. 해당 청원은 지난 1월 국민 5만 명 이상이 동의해 법사위에 회부된 바 있다.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국민청원이 상임위에 회부되면, 90일 이내에 심사를 마치고 국회의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다만, 특별한 사유로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못하였을 때에는 위원장은 의장에게 중간보고를 하고 60일의 범위에서 한 차례만 심사기간의 연장을 요구할 수 있다. 즉, 최대 150일 내에 심사를 완료해야 한다.
여성신문이 국회 사무처에 정보공개 요구를 통해 받은 자료를 보면, 법사위는 앞서 4월 3일과 25일 각각 해당 청원의 심사기한을 6월로 연장했다. "소위에 회부하여 심도 있는 심사 필요"가 연장 사유였다. 하지만 이번 법사위는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에 대해 어떠한 논의도 없이 제22대 국회 전반기 임기 만료까지 추가 연장 결정을 내렸다.


차인순 국회의정연수원 겸임교수는 "국민동의청원은 입법청원이나 보완입법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지만, 관련 법안이 없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일 경우 소관 상임위에서 청원 심사 기간을 연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동의강간죄 같은 경우에는 의원실에서 관련 법안을 발의해야 청원의 효과가 발휘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법안 발의나 논의를 회피하면서 실질적인 입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22대 국회에서 비동의강간죄 관련 법안은 단 한 차례도 발의된 적 없다. 정혜경 진보당 의원은 지난 3월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으나, 발의 요건인 의원 10명의 서명을 확보하지 못해 발의가 지연되고 있다. 정 의원은 "국회에서 비동의강간죄를 책임 있게 논의하기는커녕 '나중에' 처리하자고 미룬 것이 안타깝다"며 "저도 형법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아직 공동발의 의원 10명을 채우지 못하고 있어 죄송할 따름이다"고 밝혔다.
국회가 논의를 미루는 사이 피해자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억울한 흙수저 성범죄 피해자, 비동의강간죄 국회발의 통과 촉구에 관한 청원'을 작성한 A씨는 "청원이 법사위에 회부된 지 반년이 지났는데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며 "지금도 매일매일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위해서 1인 시위를 하고 있고, 시위 후 탈진으로 병원에 가서 링겔 치료를 받는다. 언제까지 국회의 문을 두드려야 하냐"고 호소했다.

'비동의 강간죄'는 상대방의 동의가 없거나,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현행 형법상 강간죄는 저항이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이 있어야만 인정된다. 하지만 실제 여성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강간은 폭행과 협박을 동원하지 않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2024년 강간 피해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218명 중 153명(70.2%)의 사건은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강간죄 개정은 입법부가 형법을 바꿔야 하는 문제라 당장 어렵다고 해도, 그에 앞서 법사위 차원에서 공청회를 열고, 해외 입법 사례를 조사하거나 성폭력의 사각지대를 분석하는 등 다양한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며 "그러나 지금 국회는 일부 반대 의견에 편승해 청원과 법안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은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 4월 프랑스는 형법상 강간의 정의를 '비동의'로 명시하기로 결정했다. 옆 나라인 일본도 2023년부터 비동의강간죄를 시행하고 있다. 일본은 술이나 약물 섭취, 수면 등으로 의식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오랜 학대를 당했거나 사회·경제적 지위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경우 등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어려운 상태'로 규정했다. 그 외에도 미국, 독일, 스웨덴 등도 비동의 강간죄를 시행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이미 한국 정부의 형법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5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와 인권이사회는 강간의 기준을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로 정의하도록 권고했고, 2026년 6월까지 해당 내용에 대한 특별보고를 하도록 대한민국 정부에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