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의 최고 여류시인 중 한명으로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 위명이 대단하였다. 난설헌시집이 출간되자 중국대륙은 열광에 빠졌고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진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열조시집>, "당나라 대표시인 이태백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고금야사> 등의 극찬이 쏟아지게 된다.
난설헌의 시는 중국,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끌었다. 1695년에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직접 "최대한 조선 고금의 시문들을 얻어오되, 다른건 몰라도 동문선과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 김생, 안평대군의 필적은 무조건 가져오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난설헌집 중간본이 처음 유출된 후 제발 난설헌시집을 좀 더 보내달라고 사정하다 결국 분다이야(文台屋次郎)에서 아예 직접 판목을 만들어 난설헌시집을 찍어내서 수많은 일본 여성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한편 보수적인 조선 사회는 허난설헌에 대해 좋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여성이 한문을 배워서 시를 쓴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조선 시대에 허난설헌의 시가 널리 알려지고,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은 남성 문인들이 못마땅히 여기기에 충분했다.
17세기의 유명한 진보적인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허난설헌에 대해 “일반적으로 규중 여인이 시를 읊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18세기 또 다른 실학자 홍대용은 중국인 반정균이 허난설헌을 칭찬하자 “비록 이 부인의 시는 경지가 높지만 그의 덕행은 그의 시보다 멀리 뒤떨어집니다” 라고 대답하며 "미남으로 이름난 당나라 시인 두목지의 호가 '번천'이었으니, 난설헌도 자신의 자를 '경번'이라 짓고, 이렇게 음란한 시를 지은 것이 아니냐"며 깎아내렸다(이에 대해 반정균은 “그도 그럴 것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못난 남편이 따르게 됐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조선 시대는 진보적인 실학자들마저, 여성예술가에게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사생활을 들먹이며 흠잡았던 모양이다.

참고로 홍대용은 나름 조선시대에 지구 지전설까지 주장할 정도로
진보적인 실학자였는데도 저 정도였다는거....
연암 박지원이나 홍대용같은 사람들도 '잘난 여자'를 평가할때는 한없이 찌질해졌던걸 보면
여혐에 있어서는 역시 좌나 우가 따로 없다는게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