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장 프랑수와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이삭 줍는 사람들(The Gleaners, 1857)’ 속 여인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구부린 채 떨어진 이삭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있다. 추수는 끝났고 남은 것은 찌꺼기 같은 곡식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마저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다. 밀레 그림 속 평민들은 가난했지만, 땅에 대한 신뢰가 있다. 환경이 척박해도 사람들의 눈은 삶을 향해 있다. 이삭은 작고, 그것을 줍는 행위는 느리며 다소 거칠었지만 오히려 이삭 한 알 한 알이 소중했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는 피곤과 절망이 아니라 조용한 투쟁의 의지가 담겨있다. 우리의 눈으로는 그저 평화로운 추수 후의 이미지로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동시대의 프랑스 귀족들은 그 투쟁의 의지를 금방 알아채고 그의 그림을 경계했다.
나는 오늘날의 또 다른 ‘이삭 줍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들-키리바시, 투발루, 몰디브 등 그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적도 없는 탄소 더미 속에서 국가 전체가 바다에 잠겨가는 현실을 매일 견디고 있다. 밀레의 농민들이 땅 위에서 등을 구부렸다면 이들은 바닷물 앞에서 생존의 끈을 붙잡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선진국의 시선은 과연 어떠할까. 기후 위기로 사라지는 섬나라의 현실 앞에서 그들은 때로 안타까움을 말하지만 근본적인 변화에는 주저한다. 마치 밀레의 그림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던 상류층과 귀족들처럼 말이다.
밀레가 표현한 농민들의 굽은 허리는 연약하지 않았고 투박한 손에는 노동으로 다져진 힘이 있었다. 그들은 땅을 갈던 쟁기를 들고 있었지만, 귀족들은 그것이 언젠가 자신들을 향한 무기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었다. 결국 그들이 느낀 불편함은 죄책감이자 경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의 침묵이 어쩌면 세상을 향한 투쟁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현재 해수면의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나라들의 고통을 직시한다는 것은 농민들의 삶에 직면하였던 귀족들의 마음과도 같다. 탄소배출의 책임을 선진국들, 즉 우리들이 져야 한다는 진실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싸움은 결코 작은 섬나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밀레의 그림이 단지 농민들의 그림이 아니었듯 지금의 해수면 상승도 그들만의 현실이 아니다. 해수면 상승은 미래의 경고다. 그리고 그 경고는 이미 더 많은 도시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어릴 적 우리집에서 키우던 작은 잡종 강아지 ‘해피’가 떠오른다. 해피는 현재 내 인생에서 결코 긴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10살의 나에게는 해피와 함께한 5~6년이 인생의 절반이었다. 방학을 맞아 사촌집에 며칠 머무르고 돌아왔을 때 아주 갑작스럽게도 해피가 없었다. 시골길에 뿌려진 쥐약 섞인 음식이 마지막이라고 들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동네 골목을 헤맸다. 흙이 오목하게 쌓인 곳을 보면 혹시나 여기가 해피가 잠든 곳인가 싶어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분명히 있었지만 없어진 것들은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사라짐은 대부분 잠깐의 방심, 아주 작은 외면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갑자기 없어진 것에 대해 너무 늦게야 소중함을 깨닫고 빈자리의 공허함을 느끼며 후회한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해수면은 끈질기게 올라올 것이다. 지금은 섬이지만 다음은 도시다. 뉴욕, 뭄바이, 자카르타, 방콕 등 대도시도 예외가 아니다. 언젠가 그들 역시 이삭을 줍는 자세로 스스로의 터전을 되찾아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밀레의 그림은 인간의 존엄과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그리고 오늘의 기후 현실은 우리 모두가 그 그림 속 인물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미 사라졌고 누군가는 아직도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파도는 예고 없이 밀려오고 우리가 잃는 것들은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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