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4월 1일 수요일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5공수특전여단(현 국제평화지원단의 전신) 군인들이 천리행군을 하던 중에 일어난 참사. 원인은 기상이변, 그리고 기상이변에도 불구하고 대대장이 무리하게 훈련강행을 명령한 탓이었다.
대대장이 이런 무리한 결정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들이 육군 특수부대인 특전사라는 점이었다. 특전사는 적지가 어떠한 악조건이라도 작전을 해야 하는데, 만약 대대장이 비가 온다고 훈련을 멈추었다면 대대장 개인뿐만 아니라 특전사 전체의 평판이 낮아진다는 것 때문이었다. 21세기 들어서는 군인들의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지휘관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당시까지는 안전불감증이 지금보다 심각했다. 그리고 대대장이 행군을 계속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무렵에는 부대가 심각한 상황에 처하진 않았기 때문에 '신속하게 행군해서 지역을 이탈하자.'는 중대한 오판을 했다.
특전사 대원들은 민주지산을 오르다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 온 몸이 흠뻑 젖었지만 그대로 산악행군을 계속하였다. 계속 정상을 향해 걷는데 기상이 급변하였다. 4월 봄인데도 갑자기 추워지고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에 이르면서 비가 눈으로 바뀌어 거센 눈보라까지 몰아치자 대원들이 저체온증으로 쓰러졌다. 옷과 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기온이 급하강하면 바로 저체온증에 시달리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겨서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불로 몸을 말려 체온을 높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
게다가 심한 악천후로 헬기도 못 뜨는 등 구조가 늦어져 결국 여단 예하 제23특전대대 소속 김광석 대위(학군 30기), 이수봉 중사, 오수남ㆍ이광암ㆍ한오환ㆍ전해경 하사 등 총 6명이 저체온증으로 동사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1998년 3월 28일 토요일 특전사 제5공수특전여단 제23특전대대 소속 대원들이 천리행군을 시작하였는데 충청남도 칠갑산에서 출발하여 약 8일 동안 속리산과 월악산을 거쳐 대모산에서 훈련을 종료하는 일정이었다.
5일차인 4월 1일 수요일 오후 1시 대원들은 전라북도 무주군 하두마을에서 출발하여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에 소재한 민주지산(1,241m) 정상으로 항했다. 일기예보상으로는 비가 조금 내린다고 하였으나 출발한 지 1시간쯤 뒤부터 비가 많이 쏟아져 내렸다.
오후 3시 민주지산 6부 능선을 통과할 즈음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서 비가 갑자기 눈으로 바뀌더니, 오후 4시 8부 능선을 지날 무렵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눈보라가 몰아쳤다. 봄에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고 기상청의 일기예보도 예측하지 못한 드문 기상이변이었다. 이후 부대의 행군속도가 느려지더니 4시 50분 무렵에는 일부 인원들이 저체온증으로 탈진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기상이 정상화될 때까지 훈련일정을 잠시 중단하고 일단 휴식을 취해도 될지 대대본부에 문의했으나, 당시 대대장은 "훈련을 예정대로 강행하라." 하고 지시하였다. 아직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현장을 통과하자고 오판한 것이다.
오후 5시 선두 인원이 민주지산 정상에 도달하였으나 날씨가 워낙 춥고 기상이 나빠 통신장애가 생겼다. 이 무렵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에 달했다고 한다. 5시 30분부터는 부대에서 탈진자가 다수 나왔고, 오후 6시 20분에는 9부 능선 후미 부대에서 첫 순직자가 발생하였다. 후미 인원도 얼마 뒤에 정상에 도달했다.
오후 6시 반, 산을 내려가면서 첫 구호소를 설치하여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은 인원을 구호하였다. 상태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인원들은 그대로 하산하였으나, 오후 7시 10분 5부 능선에서 결국 선두부대에서도 탈진 환자가 다수 발생하여 2차 구호소를 설치했다. 다른 병력들은 계속 하산하였으나 또 다시 3차 구호소를 설치해야 했다. 병력 일부가 겨우 겨우 하산하여 민가에 도착한 때는 오후 8시 10분이었다. 이들은 민가의 전화기를 빌려 부대에 구조를 요청하고 물한분교에 임시 대피소를 마련하였다.
영동소방서 119 구조대는 부대로부터 "헬리콥터를 띄워 달라"는 요청을 접수하였으나 기상이 워낙 나빠 헬리콥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구조까지 시간이 오래 늦어지는 바람에 순직자가 더 늘어났다. 구조대는 오후 9시 10분에야 도착하여 환자들을 후송하였으나, 어두운 밤중인 데다 눈 쌓인 산속이고 대원들이 흩어져 있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결국 이 사고로 후송 도중 순직한 인원까지 포함하여 총 6명이 숨을 거두었다. 당시 기사에는 사망한 6명 외에도 실종자 1명이 더 있다고 보도했으나다음날 탈영병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구조 과정에서 김광석 대위는 먼저 저체온증에 걸려 대열에서 낙오된 한오환 하사를 구하려다 같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순직자들은 1계급씩 추서되었다. (본 항목에서는 사고 당시의 계급으로 기록하였다.) 대대장 이춘일 중령(3사 15기)은 사고의 책임을 지고 보직 해임되었고 여단장 천연우 준장(육사 28기), 여단 정보참모 김학영 소령(단기 15기)은 징계 조치되었으며 고어텍스가 전군에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1년 11월에 영동군수와 부대가 합동으로 위령비를 민주지산 입구에 세웠으나, 도로 근처라 장소도 좁고 위험하여 2017년 12월 4일에 이전하였다. 위령비와 별도로 국제평화지원단은 2017년 6월 1일 민주지산의 첫 구호소를 세웠던 터에 작은 추모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