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시절 중국에 들어온 가톨릭성직자 마테오 리치
1601년에 자금성에서 만력제를 접견하였다. 만력제는 마테오 리치가 헌상한 자명종 및 다양한 기계에 관심을 보였다. 마테오 리치는 해박한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사대부들과도 교류하였으며, 이후 중국에 성당을 짓고 선교에 나섰다.
당시 예수회는 황제가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진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하려면 먼저 황제를 개종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접근했다. 만일 황제 및 사대부가 개종한다면 자연히 일반 백성들도 따라서 개종하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마테오 리치는 황제 및 황제를 보필하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마테오 리치뿐만 아니라 예수회 자체가 신앙인 엘리트 집단을 만드는 걸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도 있는데, 예수회가 선교한 주요 나라마다 예수회가 만든 여러 학교를 창설해서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침 마테오 리치는 구태소(瞿太素, 1549 ~ 1612)라는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와 안면을 텄다. 리치는 그에게 수학, 과학과 같은 서양의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레 교류하였고, 구태소는 마테오 리치의 인품과 학식에 매료되어 다른 사대부들에게도 그를 알렸다.
마테오 리치의 글은 조선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기하원본』을 저술하여 조선에 전해졌고, 저서 『천주실의』 역시 조선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한 이수광이 저서 지봉유설에서 처음 소개한 이래로 널리 퍼져, 천주교가 자연스레 전해지는 가교가 되었다. 유학자들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성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교를 불교와 같은 허망한 종교라 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얻을 것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 때문에 이후 이익의 제자들은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공서파와 종교로 신봉하게 되는 신서파로 나뉘었다.

마테오 리치 스스로 중국쪽에 집중하고 중국에 전도하기 위해서 천주실의를 썼지만 이 책을 가져간 당시 조선 학자들중 일부가 푹 빠짐
그리고 알아서 종교로 받아들이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 생김

당시 나폴레옹에 의해 납치되서 프랑스로 끌려간 교황 비오6세는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는 조선 땅에서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 자라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바티칸의 비상금 일부를 털어 카펠라리 추기경, 곧, 훗날의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 가톨릭의 기적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
이 인연 때문인지 후대의 교황들은 조선에 꾸준히 선교사제를 파견하여 가혹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속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게 했으며, 1886년 박해가 끝난 후로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한반도에 특별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47년 대한민국을 UN에 앞서 최초로 국가로 승인한 나라가 바티칸이었으며, 이듬해 대한민국이 UN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로 인정을 받을 때에도 바티칸에서 파견된 사제들이 천주교의 교세가 강한 남미 및 남유럽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