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흥미돋는글
백석은 평양을 떠난 이후 거의 창작 활동을 하지 않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1961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이 발행하는 문학지 ‘조선문학’ 12월호에 ‘돌아온 사람’ 등 농촌 정경을 담은 시 세 편을 발표한 것이 마지막이다.
백석의 집에는 그의 창작 노트 등 그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장남 화제 씨는 송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가 생존시 남겼던 번역소설 원고도 이젠 많은 세월이 흘러오면서 다 휴지로 써 버렸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댓펌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 속에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나루터- 시인 백석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 4년 뒤 그는 죽었다.
바다는 이 나라 사람들 위해
아담한 문화 주택 골고로히 세워주네
재봉기도 라디오도 사들이네-
그 품에 담뿍 안은 기름진 물고기들로
살찐 미역이며 다시마며 조개들로…딴 나라 사람들 이 나라로 와
이 바다, 어떤 바다이냐 물으면
이 나라 사람들 선뜻 대답하리라-
이 바다, 사회주의 나라의
사회주의 바다라고
- 사회주의 바다- 백석 북한에 있을때 쓴 시중에 어색하게 북한 체제 찬양 붙어있는 시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백석은 월북이 아니라, 그냥 해방 이후 고향에 남아 있었을 뿐.. 물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김일성 독재를 예상할 수 있던 것도 아니니, 여러로모 안타까울 뿐. 보통 백석같은 경우는 재북이라고 하더라 월북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 곁에 남는다고 남한으로 안온걸로 아는데 (조만식 선생도 자신이 남한으로 가면 북녘 동포들은 누가 책임 지냐면서 북한에 잔류함) 조만식 선생은 1950년까지 자택 연금으로 갇혀있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북한군에 의해 총살 당해 돌아가심
백석이 월남 제의를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4개 이유로 반대했다고 함.
1. 고당 조만식 선생을 모셔야 한다.
2. 처 그리고 큰아들 화제만 데리고 혹은 혼자만 못 간다. 다른 가족과 친지가 너무 많아 월남하면 남은 가족 친지가 고초를 겪을 것이다.
3. 가족 친지 모두 터전이 북에 있는 서민이다. 모두 같이 간다 해도 남에서 생활 터전이 없어 더 힘들지도 모른다.
4. 이젠 감시가 심해 가고 싶어도 못 간다.
백석은 애초에 평북 사람이었던 점도 고려해 볼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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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증명사진(왼쪽).
1980년대 중반에 촬영한 가족사진(오른쪽). 백석 옆에 있는 이가 부인 이윤희씨이고 뒤는 둘째 아들과 막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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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교과서도 실리고 유명해진 사실도 아셨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