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뉴라이트는 윤 정부에서 ‘제2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뉴라이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 2003년 차떼기 사건 수사, 2004년 노무현 탄핵 역풍과 총선 참패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대로는 보수가 궤멸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때 한나라당이 주목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New Right)’ 정풍 운동이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뉴라이트 정풍 운동에 대해 “최근 386 출신 인사들이 참된 자유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고 추켜세우며 이들을 흡수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386세대 학자 중 일부는 소련의 붕괴, 즉 마르크스주의의 실패를 목도하고 전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기존에 신봉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철저히 부정하는 한편 봉건주의 사회가 자유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이른바 사회진화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대한해협 건너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등 한·일 관계 전문가의 말을 종합하면, 일본 극우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위해, 그리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겨났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이러한 목적을 담아 만들어진 대표적 일본 뉴라이트 단체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 뉴라이트 정풍 운동이 피어날 당시 일본 극우도 한국 뉴라이트를 주목하고 있었다.
호사카 교수는 “2002년 일본 극우 쪽에서 한국의 뉴라이트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며 “그렇게 해서 2004년 한국에 뉴라이트전국연합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뉴라이트는 일본 극우와 교류하면서 변질돼 갔다.
보수의 새바람이라는 순수한 목적은 잃은 채 일본 극우 쪽에 유리한 부분만을 연구했다. 필요하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 ‘일제강점기 통치는 합법’ 등의 주장이다. 이후 뉴라이트는 점차 ‘역사 정치화’의 성격이 강해졌다. 식민지 개발과 후진국 착취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은 뉴라이트의 핵심인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현됐다.

이를 부추긴 것은 일본 극우 세력의 막강한 자본이다. 뉴라이트의 대표적인 돈줄인 ‘닛폰재단(The Nippon Foundation)’은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세운 재단이다.
2004년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사무총장을 지낸 아시아연구기금은 닛폰재단의 자본으로 설립됐다.
류 전 교수는 2019년 9월 연세대 사회학과 전공과목 ‘발전사회학’ 강의 중 수강생들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춘에 종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라는 취지로 발언해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고발됐다.
호카사 교수는 닛폰재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닛폰재단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사사카와 평화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자금을 동원해 미국 정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 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사사카와 평화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는다. 공화당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당시 북한과 관계가 개선됐다가 민주당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집권하고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고 한·미·일 군사동맹 필요성이 부각된 데는 사사카와 평화재단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익명을 원한 한 역사학자는 “일본 극우의 목표는 북한과 대립하는 정권을 만드는 것”이라며 “한·일 군사동맹, 더 나아가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어 북한 그리고 중국까지 무너뜨리는 것이 일본 극우에 이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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