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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에서 10대 여고생 두 명이 GHB가 든 탄산음료를 마시고 사망했다. 이 일을 계기로 피해자들의 이름을 딴 데이트강간 약물금지법이 제정됐다. 강간약물의 소지와 이용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규정할 뿐 아니라 약물 성폭력에 대한 수사·기소의 매뉴얼을 마련하고, 강간약물에 대한 연구 보조금을 조성하며, 연례보고서와 캠페인을 전개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해외의 약물 이용 성범죄 관련법을 비교 연구한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연구관은 국내법의 사각지대를 지적했다.
해외 데이트강간 약물금지법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2000년 관련 법이 제정된 미국의 경우 GHB를 사용하다 잡히면 최대 20년, 단순 소지해도 3년 형에 처하게 했다. 처벌뿐만 아니라 쉽게 검출되지 않는 약물의 특성을 고려해 수사·기소 과정에 표준절차를 마련한 점이 유의미하다. 해당 법을 통해 매년 데이트강간 약물 이용 발생 건수를 의회에 보고하고 정책적 차원의 모니터링을 한다. 영국은 한국과 달리 ‘동의 모델’을 기반으로 강간죄를 처벌한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는 부동의에 의한 강간으로 보고 종신형까지 처할 수 있다. 2007년 검찰청·보건부·행정부 등이 데이트강간 약물의 위험성에 관한 대처를 구체화하고, 약물 검출 및 증거 채취 등 증거수집 강화를 위한 집단적 논의 후 관련 법을 강화하기도 했다. 신종 강간 약물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런 약물들의 효과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거듭 감시하고, 그에 따라 신고·입건·수사·입증·판단 등에 필요한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정부 차원에서 제시하고자 여러 국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한국은 데이트강간 약물금지법이 별도로 제정되지 않았지만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죄와 강간죄를 병합 적용할 수 있다는데.
‘약물 이용 성범죄’의 위험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기에는 부족하다.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은 마약 전반에 관한 규제로, 자가 복용·소지·유통·거래를 규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해당 죄의 보호법익 역시 국민보건 향상이다. 타인에 대한 사용 규제와 데이트강간 등 성범죄에 사용하는 것을 처벌하는 규정이라고 보기 어렵다. 형법에 강간죄·준강간죄가 존재하지만, 각각 폭행·협박에 대한 입증과 항거불능·심신상실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다. 이 경우 ‘약물 이용 성범죄’의 특성이 간과될 수 있다. 예컨대 GHB를 복용할 경우, 피해자가 그저 반응에 불과한 답변을 하기도 하는데 이를 악의적으로 녹화·녹음해 동의에 의한 성행위라고 주장하고 용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범죄의 악질성과 고의성을 고려해 처벌하는 형사법의 원리가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 단순히 병합 이상의 가중처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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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성범죄 발생 시 죄목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기도 한다.
약물을 폭행으로 보고 강간죄를 적용하거나 심신상실, 항거불능 상태로 보고 준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다. 약물을 위험한 물건으로 보고 특수강간죄를 적용하거나 약물로 신체가 훼손되었다고 보고 강간상해죄를 적용할 수도 있다. 약물 성범죄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검사와 재판부에 따라 적용되는 죄목이 다르다. 피해자 구제에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선 방안은?
성폭력처벌법에 별도의 조항(마약·임시 마약을 이용해 강간의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한 처벌 조항)을 신설하거나 형법에 강간·강간치상·준강간죄가 있듯이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약물을 사용한 성범죄는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넘어서서, 성매매와 아동·청소년 유인, 불법 촬영과 유통 등 다양한 형태의 젠더 폭력으로 확대된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엄격히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가해자를 엄벌함으로써 이 같은 젠더 폭력 행위를 예방하겠다는 국가적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