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나라 만력제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 신종 만력제의 조서, 《선조실록》 선조 32년(1599) 5월 20일 정묘 4번째 기사
명나라의 영토가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까지 병력을 보내 도움을 주는 것은 강렬한 조선 보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동아시아) 정벌이라는 목표를 감안하면 만력제의 판단은 의외로 옳았다. 만력제는 단지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조선 출병을 강행한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일본군의 전투력을 봤을 때는 조선에서 싸운 것이 오히려 명나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오닌의 난 이후 150여 년 동안 지속된 센고쿠 시대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명군 참전에 따른 세력 균형은 일본이 전쟁에서 주저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만력제 본인 및 명나라 전체의 위신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어쨋든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은 가장 관계가 좋고, 비중이 큰 번국이자 우호국이었다. 이런 조선을 지켜줘서 '천조'와 '천자'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병력만 파병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백성들이 수확을 못 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지대인 산둥성의 쌀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경신대기근급의 참사가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사료를 살펴보면 (제정신으로 했든, 미쳐서 했든) 만력제의 강한 의지 덕에 조선이 도움을 받은 면도 있음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재조지은이라며 만력제가 좋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당장 임진왜란 한참 뒤인 정조의 치세때 정조 스스로가 이순신을 칭찬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데도 서두부터 신종 황제께서 나라를 도와 구한 은혜가 크다로 시작하고 있다.
또한 광해군이 명나라의 독촉을 못이겨 후금 토벌전에 원병을 보낸 후, 사르후 전투에서 수천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자, 만력제는 전사한 조선군 장병의 유가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수만냥을 보냈다. 이로 인해 만력제는 중국인들로부터 '고려 황제' 혹은 '고려 천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