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매거진=MIA 작가] 올해 초, 처음으로 시 쓰기 수업을 들어 보았다. 총 6주간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방식은 단순했다. 매주 시인이 소개하는 시를 읽고, 과제로 쓴 시를 발표하고 합평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는데, 회차당 2시간인 줄만 알았던 수업이 3시간은 기본이고 4시간 이상을 초과할 때가 많았다. 9명 정도 되는 수강생들이 각자 쓴 시를 발표하고 시에 관한 다른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듣는 것만으로도 한 명당 20분, 30분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 반쯤 시작해서 12시 가까이 진행되는 수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즐거웠기에 가능한 한 성실히 임하려고 노력했다. 시 쓰기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발견한 덕이 컸다.
그동안 내 안에 아직 적확한 의미가 되지 못한 채 편재하는 단어나 문장들이 어떠한 형식으로 채집되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나 보다. 목적 없는 메모는 핸드폰에 잠들어 있다가 간혹 작가 노트가 되기도 하고 칼럼이 되기도 했으며 편지가 될 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표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를 쓰며 이제 그 낙서들이 길을 찾을 방법을 알게 되었고 카타르시스에 비견할만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래서인지 수업이 끝난 지 어언 한 달이 넘게 지났지만 시를 쓰는 즐거움이 삶에 안착하였고, 나는 요즘도 때때로 단어들을 갖고 노는 중이다.
수업을 통해 그림과 마찬가지로 시 또한 아주 구체적인 현실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배웠다. 예술에 작동하는 어떤 원리에 의하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는 이 진실은 시를 쓰던 어느 날, 보다 생생한 도안으로 내 안에 떠올랐다.
한번 묘사해 보겠다, 다음과 같이: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상투어가 난무하고 뾰족한 감정들이 정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날아다니는 세계 하나와 아름다운 언어가 언어만의 논리로 운영하는 세계 하나이다.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거칠고 날카로운 경험의 세계를 좀 더 아름답게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상투어는 자연스럽게 시어의 세계로 침투한다. 자신이 입을 만한 옷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적당히 치장한 모습으로 문득 내 앞에 나타나면 나는 그것들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거나 불필요한 장신구는 벗겨 버린다. 나름의 무게를 구별하여 순서를 매겨 나열하면서 리듬을 만들고 뚜렷하게 드러낼 의미를 강조하거나 어떤 건 감추기도 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시가 쓰인다. 삶에서 글이나 그림이 태어난다는 해석은 일반적이겠지만, 일기나 칼럼을 쓸 때는 이런 식으로 창작 과정을 떠올려 본 적은 없었다.
신기한 경험이므로 오류를 무릅쓰고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을 덧붙여 보자면 일반적인 글쓰기와는 달리 시 쓰기는 조금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있고 그만큼 모험을 수반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가능한 한 가까이 가보겠다는 무모한 동인 혹은 강력한 의지가 숨어 있다. 타인이 모호하게 느낄 수밖에 없을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존의 언어 체계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면서까지 시어가 자신의 갈 길을 개척해 나가는 행위가 근거가 될 수 있다면. 마치 그래야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있다는 듯하다.
익숙한 틀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시가 쓰이는 이러한 과정은 내가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해내고 싶은 작업의 특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현실을 재료로 쓴다는 점에서, 재조합한 현실은 다른 현실을 얘기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나는 늘 사진처럼 익숙한 장면을 그리고 싶어 했고, 지금도 그렇다. 단적인 예로 그림을 그리려면 머릿속에 있던 장면을 직접 보거나 연출해서 사진을 찍어야만 그림 그리기에 착수할 수 있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렇게 그리는 그림이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대상이 갖고 있는 형태 그대로를 묘사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색을 비현실적으로 바꾸거나 책 구조에서 이상한 어긋남이 생기도록 만든다. 실제의 장면을 이용해서 다른 세계로 진입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 외의 방법을 잘 모르겠기도 하다.
창작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감상하는 측면에서도 시와 그림은 닮은 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림을 볼 때 관객의 시선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머물더라도 필히 다른 면에 번져 있는 색과 형태의 관계 안에서 그 부분을 해석하게 될 것이며 특정한 요소만을 떼어낸 감상은 불가능하다. 시도 마찬가지다. 독자가 감명 깊은 부분을 발췌하더라도, 시인의 오롯한 의도 안에서 갖춘 구조를 벗어난 단어나 몇 개의 문장은 물론 시를 벗어나서는 그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란, 시인이 자기만의 의지와 결단으로 단어들의 위치와 흐름을 직조한 하나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과 경험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건 지금, 내가 시와 그림 사이에서 느끼는 어떠한 중첩된 감정이 나를 다음 작업으로 천천히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툴더라도 이끌려가면 대개 기대하지 못했던 세계로 초대되곤 했다. 이것 또한 예술을 향한 열정*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인도를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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