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밥 좀 주세요.’ 그렇게 말했던 어떤 얼굴은 지금도 오씨의 꿈에 나온다. 시민들은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머리띠를 두른 채 밥과 물을 구했다. “그게 남의 자식일 수가 있나. 다 내 자식 같은데···.” 노점 상인들은 500원이며 1000원씩 형편껏 돈을 걷었다. 양동시장 길 건너에 양동방앗간(현재 양동행정복지센터 자리)이 있었다. 그 집에 세들어 살던 또 다른 노점 상인이 방앗간 사장에게 사정사정해 밥을 쪄왔다. 찐 밥을 ‘구루마’에 실어 골목을 이용해 옛 보성상회로 옮겼다.
보성상회가 있던 자리는 현재 재개발구역이다. 어수선한 골목골목을, 오씨는 익숙하게 걸었다. “요 가게에 지하가 있어서 숨어서 하기 좋으니까 여기까지 왔어. 소금밖에 못 넣는 주먹밥을 숨어서 만들었지. 주먹밥 만든 게 알려지면 우리도 총 맞아 죽을 거라는 얘기가 많았으니까. 이번에 광장에서 집회 참가자들 위해 선결제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뉴스로 보는데 ‘저게 주먹밥’이구나 했어. 나눔도 용기야.”
‘그 시절’로 돌아갈까 봐 123일을 하루같이 전전긍긍했다. 1980년 5월의 거리에서 만났던 얼굴이 유독 많이 생각나는 날들이었다. “목숨 내놓은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 평화롭게 사는 거야. 그 말을 잊지 말고 자꾸 해야 해. 서울에서 인터뷰 온다고 하면 귀찮아. 그래도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와주는 게 고마워서··· 내가 올해 또 이렇게 말이 많네.”
윤석열 탄핵이 인용되던 4월4일 오씨는 멸치 가게 좌판에서 함께 TV 중계를 보다가 선고 결과를 듣고 양동시장 골목을 춤추며 다녔다. “내가 이래이래 팔을 양쪽으로 흔들면서 ‘이겼다! 이겼다!’ 했지(웃음).” 그날 양동시장 곳곳에서 작은 잔치가 벌어졌다. 막걸리와 닭튀김을 사이에 두고 오씨를 비롯한 상인들이 오랜만에 웃었다. 오씨는 여러 차례 당부했다. “요만큼도 반성 없는 윤석열,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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