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창했던 1980년 5월 봄날 시작된 3년여의 고행
1980년 5월 당시 저는 스물넷 청년이었습니다. 그해 5월 17일 오후 5시 30분쯤부터 19일 오전 2시쯤 사이에 신발 세 켤레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2021년 5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실었습니다. 저는 예순을 훌쩍 넘겼음에도 ‘이순(耳順)’하지도, 슬픔과 공포와 정별의 기억을 떼어내지도 못한 채 종종 비탄과 상심에 젖어 살아온 듯합니다. 사랑이든 비애든 공포든 심장에 딱 들러붙어 숨어있는 기억은 맘먹는다고 쉽사리 망각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광고를 낸 당일 오후에 강제징집과 군대내의문사 및 녹화사업 진상규명위원회 회원분의 결정적 제보를 바탕으로 키 큰 사나이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통해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가 1980년 5월 18일 이후 7년여 동안 겪은 신산 고초의 여정은 비록 지금은 제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 달 뒤인 2021년 6월 18일 낮 12시 무렵부터 약 2시간 동안 서울 이화여대 수영장 근처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중략
4. 이번 만남에는 또 다른 남자 1명도 있었습니다.
2017년 5월 초순 저는 이화여대를 방문하여 직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친께서 6.25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북한군 포로 후송 중 기총소사에 맞아 어깨와 팔 부상으로 수술 후 전역해 국가유공자가 되신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980년 5월 당시에는 수영장이 자리 잡은 건물의 경비직원이셨고 1990년대 후반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아들에겐 1980년 5월 17일 밤의 얘기를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6월 18일, 이 분도 다시 만났습니다. 신문광고로 연락이 닿은 남자와 함께였습니다. 두 번째로 만난 이 분은 생존해 계시는 노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1980년 어느 날 만취하신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내가 나쁜 놈 두 놈을 살려 주었소.” 라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1980년 5월 17~18일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버님이 유일하게 언급하신 내용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나쁜 두 놈'과 고인의 아들, 이렇게 셋이 만나 41년 전에 움직였던 동선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습니다. 물론 수영장 아래의 보일러실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수차례의 증·개축으로 인해 크게 변해버린 건물에서 1980년 5월 당시의 그 비상구를 찾지는 못했지만, 잣나무 숲과 대강당 아래의 소나무 길, 그리고 신촌역과 이화여대를 가르던 담벼락의 위치 등은 확인하였습니다.
기고문을 쓰고 있는 오늘은 6.25 한국전쟁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와 함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던 키 큰 사나이와 고인의 아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우리 세 사람은 앞으로 함께 풀어야 할 마지막 숙제 하나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기고문은 이렇게 끝납니다. 광고주에게 남은 숙제가 뭔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목숨이 오가는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준 경비직원분을 찾아 소주 한 잔 올리려 했는데 이미 돌아가셔서 보답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해는 이미 화장해 뿌렸는데 국가유공자인 이 분의 위패를 국립묘지에 모실 수 있다고 하니 나중에 경비직원분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시면 두 분을 대전현충원에 함께 모실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https://news.kbs.co.kr/news/mobile/view/view.do?ncd=5221738
지독했던 그 시절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