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혜공주 (단종의 누나)
야사에 따르면 노비로 끌려간 경혜공주는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 "나는 왕의 딸이다"라는 말은 세조에게 들으라는 말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이나 순암집에서는 순천이나 장흥의 관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나오나, 실제로는 공주의 신분을 끝까지 유지했다. 당장 실록에도 정종이 죽은 후 반년 만인 1462년 5월에 세조가 경혜공주에게 노비를 내려줄 것을 지시한 기록이 있고, 2012년에 발견된 경혜공주 사망 3일 전에 작성된 재산 상속에 관한 기록인 경혜공주 분재기(分財記)에서 그러한 야사가 허구라는 게 확실히 입증되었다.
남편은 역모죄로 죽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연좌제로 경혜공주와 두 자녀는 노비가 되어야 했지만, 공주와 두 자녀는 모두 왕족의 신분이라 노비로 전락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옹주가 반역에 관련되었어도 직위만 박탈했을 뿐 노비로 전락시킨 사례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혜공주의 인생 자체가 너무 극적이라 뭔가 더 불꽃같은 삶을 드라마틱하게 부각하고 싶었는지
조선시대에 쓰여진 책들에서조차 경혜공주가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며
노비로 일한 지명까지 구체적으로 구라를 쳐가며(...) 날조 야사들이 조선시대에도 돌아다녔는데
정작 세조는 조카딸인 경혜공주를 노비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역적의 아내가 된 공주에게 노비를 쓰라고 내려주었다고 함
야사로 알려진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대우를 해준 셈
근데 연려실기술 정도의 조선시대 책에서조차 저런 구라를 쳐놨다보니
경혜공주 노비설을 찐으로 믿는사람이 많았고
'나는 왕의 딸인데 어찌 사또 따위가 나에게 일을 시키느냐?'라는 대사까지 지어내며 구전되었는데
말그대로 왕의 딸이라는 귀한분을 아무리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리가 없었고
진짜 찐으로 역모에 가담하면서 훨씬 더 죽을죄를 지은 영조딸 화완옹주조차도 노비로 만들지는 않고
그냥 왕녀의 작위 박탈하고 유배정도가 최대로 가혹한 수준의 처벌
아무튼 저 경혜공주 노비설 때문에 실제로 공주가 노비로 떨어지는 설정이
해품달같은 퓨전사극에서도 쓰이곤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