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예비군 훈련이 끝났다. 예비군은 사회 속에서 잠깐씩 맛보는 군생활 스핀오프지만, 역시나 대한민국 군생활답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일도 자주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6년 간 예비군 훈련을 받으며 반복해서 느낀, 가장 난해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봤다. 최대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애썼으나, 부대 별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해서 읽었으면 한다.
1. 왜 훈련장은 유난히 추운가

집을 나오기 전 일기예보에서 “오늘은 기온이 풀려 다소 포근한 날씨가 될 예정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절대 속지 마라. 예비군 훈련장은 정신과 시간의 방이다. 시내가 따뜻하다고 방심했다간 차원이 다른 추위를 겪으며 6시간을 버텨야 한다.
이상하게 춥지만, 국가에서 허가한 공식 훈련 굿즈는 훈련복+야상에 국한된다. 캐나다구스나 몽클레어가 방산업체가 아니라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예비군은 기모가 빵빵한 후드티를 입는다. 그리고 동대장과 영겁의 눈치게임을 벌인다.

예비군 후드티 인앤아웃의 매커니즘
굳이 후드를 입는 건 목 언저리가 무척 따뜻하기 때문이다. 그럼 목폴라를 입으면 되잖아.
2. (이럴 거면) 왜 휴대폰을 단속하는가

입소할 때 휴대전화를 제출하는 건 의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의무라고 쓰고 권장사항이라고 읽는 게 대다수. 그래서 입소할 때 입구에서 책상에 앉은 사병 두 명이 “휴대폰 반납하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걷는다. 물론 몸 수색 까지는 안 한다. 여기서 휴대폰을 제출하는 예비군은 100명 중 1명 미만.
가끔 독한 사병이 “선배님, 휴대폰 내셔야 하는데 안 내십니까” 라고 묻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땐 “안 갖고 왔는데요” 라고 응수한다. 이건 마치 뭐랄까, 경포대에 가는데 휴대폰이 물에 빠질까봐 서울 집에 놓고 왔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리고 입소하면 동대장이 한 번 더 말한다. “휴대폰 사용하시는 분들 휴대폰 집어 넣으세요. 지금 시간부로 걸리면 퇴소조치 하겠습니다” 퇴소시킨다는 말만 벌써 세 번째지만, 이미 동대장 앞에서 고개 숙여 몰래 통화하는 예비군도 있다.
조교&동대장이 휴대폰 사용 자제를 촉구하는 과정
+ 최근 단속이 빡쎄졌다고 하는데, 사실 3개월 전 까지만 해도 그게 그거더라. 물론 부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3. 왜 민폐 캐릭터는 항상 우리 조인가

어느 집단에나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 한 명 씩은 있다. 특히 요즘 예비군은 10인 1조로 다른 조와 누가 더 빨리 집에 가나 경쟁전을 벌이는데, 꼭 훼방꾼이 한 명씩은 있어서 말없이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 피우러 사라져 팀원들을 당황케 한다.
더 심한 경우엔 말귀를 못 알아먹는 사람도 있다. 동대장과 조교가 두 번씩 설명하는 화생방 교장은 99% 합격률을 자랑하는 단체 과제인데, 여기서 뻘짓을 하다 기적의 1% 신화를 이루어 내기도 한다.
아니면 동대장이 민폐인 경우도 있다. 과제에서 사소한 트집을 잡아 탈락을 주는데, 영 뭐가 없다 싶으면 목소리가 작다고 탈락처리를 한다. 조기 퇴소자가 너무 많다는 상부의 압박이 있었거나 성격상 완벽한 꼴을 봐야만 하는 FM 아재라서 그렇다.
그러니 지금 예비군에 갔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멀쩡하다면, 운이 좋은 거다. 대신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조원들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4. 왜 담배가 계속 땡기는가

10년 금연자도 손 떨리게 만드는 게 예비군 담배다. 요즘 말투를 쓰자면 정말 오지게 피운다. PC방에서 오버워치를 하다 6연패를 해도 이렇게 줄담배를 피우진 않을 거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할 일이 없어서 피운다. 예비군 훈련 시간 중 앉아서 대기하는 시간이 80% 이상이다. 백 명이 넘는 인원을 교육하고 실습시키려면 이런 비효율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담배를 숨 쉬듯 피운다. 게다가 침은 또 왜 그리 뱉는지. ‘하품의 전염성’을 연구하는 메릴랜드 대학의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가 만약 화곡동 과림 예비군 교장에 온다면 그는 새로운 논문을 쓸 수 있을 거다. <침 뱉기의 전염성, 2016>
사실 이건 바닥이 흙과 나무, 돌 뿐인 탓이다. 군화발로 수십 명이 걷다 보면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데, 이 먼지가 자연스레 입에 들어가게 되고 텁텁함을 못 이겨 침을 뱉게 된다. 게다가 깨끗한 아스팔트 바닥이 아니라 죄책감도 덜 하니, 습관처럼 계속 침을 뱉는 것.
5. 왜 갑자기 천재가 되는가

그렇게 한참 침을 뱉다 보면 프로젝트 때문에 회사에서, 혹은 과제 때문에 학교에서 종일 고민하던 아이디어가 갑자기 수류탄 교장에서 떠오른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A학점 혹은 인센티브를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펜과 종이를 찾아 보지만 아무리 뒤져 봐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이건 반드시 기억해야한다며 머릿속으로 되뇌이지만 수류탄과 함께 아이디어를 장렬하게 투척한다. 결국 재시험 판정을 받은 충격으로 머리가 다시 백지가 된다.
6. 왜 싸구려 냉동이 땡기는가

점심시간이 되자 모두들 PX로 달려간다. 평소 편의점에서 거들떠도 안 보던 냉동식품을 굳이 꺼내먹기 위해서다. 예비군에서 굳이 PX를 가는 이유는 추억팔이 겸 10% 면세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인데(물론 크진 않다) 그래봤자 얼마 안 한다.
어제 새벽에 맛있는 BBQ를 뜯고 왔어도 슈넬은 먹어야 성이 찬다. 딘타이펑 샤오롱바오보다 맛있는 게 PX 만두다. 이런 무리한 추억팔이 때문에 행복하던 우리 위장이 힘겨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병장 때 짱질하던 기억만 남아서, 냉동 까고 전자렌지 앞에 있으면 짬밥 놀이하던 우월감에 잠시 젖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전부 병장들뿐이다. 너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전자렌지 돌리느라 30분을 허비하고 소중한 점심시간을 잃는다.
7. 왜 모두들 대단한 사람들 뿐인가

점심을 먹으며 낯선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직업군을 접하게 된다. 개중엔 중고차 딜러도 있고, 스포츠토토만 하면서 월 3~4백씩 버는(번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전직 K리그 선수, 의약품 딜러, 20대 중반의 젊은 노래방 사장까지. 게다가 전부 연 수입 5000 이상은 기본이다. 내가 한창 취준생일 땐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잘 나가는 것 같아 자괴감을 느꼈다.
요즘은 잡지사 에디터라고 하면 사람들이 “오, 형님은 연예인들도 많이 봤겠네요”라며 부러워한다. 사실 그렇진 않은데 “아, 네. 뭐…”라며 말끝을 흐린다. 전효성? 예쁘지. 현아? 암. 나도 종종 (TV에서) 봤는데 예쁘지. 물론 직접 봤다고는 끝까지 말 안 했다.
8. 왜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는가

Case 1. 동네 토박이라면 예비군에서 우연히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가 있다. 심심하고 삭막한 훈련장에서 저어어어언혀 안 친했던 그 친구가 괜히 반가워 아는 척 한다. 이왕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대사를 적어 보자면,
“너…! 혹시 대학중학교 2학년 3반 코찔찔이 박누리? 나야, 나! 대학중 황태자 조웅재!”
이렇게 반갑게 만나서 당일치기 베프가 된다. 그리고 언젠가 맥주 한 잔 하자며 번호 교환하고 영원히 안 만난다.

Case 2. 새로 만난 사람들끼리 파티를 맺어 움직이다 보면 “우리 조 정말 잘 맞는다”며 베프가 되기도 한다. 번호까지 교환하지만 그 날 맥주 한 잔 하자고 해도 각자 사정이 있다며 절대 안 한다. 대신 아까 그 젊은 노래방 사장이 “저희 가게 곧 리모델링 끝나는데 끝나면 형님들 다 초대할게요!” “그래! 그래!” 하면서 훈훈하게 헤어지고는 아무도 연락이 없다.
그리고 다음 예비군 때 그 노래방 사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모른척하더라. 야, 가게 망했냐?
9. 왜 근자감이 생기는가

고려 시대 문관 서희도 소손녕이랑 맞장 뜨러 갈 때 디지털 군복을 입었다는 야사가 있다(구라). 군복은 없던 자신감도 만들어 주고 강동 6주도 돌려받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입고 있으면 생판 모르는 사병에게 “조교야”라며 말을 놓을 수 있고, 사적인 심부름까지 시키는 용기가 생긴다. 딱 중고딩 때 일진놀이 하던 애들이 만만한 애들 만나서 갑질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런 갑질도 PX에서 훈훈하게 마무리한다면 없던 일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 뻘 동대장에게 욕지거리를 하는 용사도 있다. “발이 아파서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던 어떤 예비군은 동대장이 “대신 군화는 들고 다니셔야 한다”는 조건을 달자 “X발! 아프다는데 지X이야!”라며 욕설을 내뱉더니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 때 시간이 오후 4시. 불과 훈련 종료 30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10. 왜 귀가하면 피로가 사라지는가

국방색 옷을 입으면 체감상 체력이 두 배 빠르게 감소한다. 움직임은 적지만 추위와 먼지 때문에 심신이 금방 지치기 때문.
그래서 훈련이 슬슬 끝나가는 4시 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너무 피곤하니 집 가면 한 숨 자야지.”,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퍼질러 자야지.”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폰게임하고 페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도착하고 샤워를 싹 하고 나오면 갑자기 정신이 말끔해진다. 예비군으로 허무하게 소모해버린 시간이 아까워서 보상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피곤해 아무래도 한숨 자야지… 하며 마우스를 잡는다.
이후 새벽까지 자발적인 추가 사격 훈련을 하다 잤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