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소리는 원래 하층민~평민들의 취향에 맞춰서 음담패설과 사랑 이야기를 선보이는 장르로서
18세기 영정조 시기에 본격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루더니
19세기부터는 양반들도 즐겨듣는 국민적인 장르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상류층의 취향에 맞춰 옛날 중국의 고사나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까지 레퍼토리로 다루기 시작했고
양반층의 니즈에 딱 맞추자 양반층들 사이에서 판소리의 인기는 더욱 커졌다.
(그리고 양반도 사랑 얘기 좋아했음.)
소리꾼들은 양반의 고래등같은 저택에 불려가서 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양반들의 후원과 애정을 받게 된 판소리는 더욱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판소리가 19세기에 들어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이유에는
당시 한반도의 최고권력자였던 이 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역할이 매우 컸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자가 되기 전 한량시절부터도
중인이나 서얼 출신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본인 역시 시서화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등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애호가였다.
박유전이나 진채선같은 소리꾼들은 아예 대원군이 자신의 저택인 운현궁에 머물게하며
아낌없이 후원을 해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흥선대원군: 잘 들었다. 너가 바로 천하제일 강산이다!!
대원군은 소리꾼 박유전을 극찬하며 강산이라는 호를 내렸다고 한다.
박유전은 이에 응하듯 대원군의 사랑채에서 기술을 더욱 연마해서 자신의 호에서 딴 "강산제"라는 새로운 스타일 판소리를 만들었다.
이렇게 대원군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에 고종 시기에 들어 판소리는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
박황의 ‘판소리 소사(小史)’에 의하면 1900년을 전후로 전국에 이름난 명창이 200인을 넘어섰다고 한다. 조정은 민간의 예능과 음악 장르가 발전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보았으며 조정 대신들 본인들도 즐길 정도였다.
궁중연회, 국가행사에 판소리를 적극 이용했고 20세기 대한제국 시절에는 만수성절이나 천추경절 같은 황제와 황태자 탄신일 등 공식적인 경축 행사해 다른 민간 재주꾼들과 함께 판소리꾼이 궁에 초대되어 실력을 뽐냈다.

다만 판소리가 서민들이나 하류층의 문화였을때에는
말 그대로 시장이나 저잣거리에서 불려지던 날것이었다보니
'뼈와 살이 타는밤' '그놈의 불기둥'같은 노골적인 음담패설과 섹드립이 판소리의 정체성과 같았는데
양반들이나 조정 대신들, 심지어 왕족들까지 향유 계층이 확대되면서
그런 대사들은 모조리 편집되고 상당히 얌전한 성격으로 바뀌게 됨
판소리가 서민문화였던 시절에 인기있던 대사인 '뼈와 살이 타는밤'이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회왕의 고사에서 유래된 '운우지락'이라는
어려운 양반님들네 고사성어로 바뀐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음

옆나라 일본에서 에도시대 도시문화, 대중문화의 대표격으로 발전된 가부키 역시
원래는 시장 길바닥에서 천막쳐놓고 하던 서민문화였으나
막부의 중신들이나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이 본격적으로 향유하게 되면서 의상과 세트도 더 화려해지고
결국 전용극장까지 생기게 되며 대표적인 전통문화로 자리잡게 된 것과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음
다만 판소리의 경우 이 과정이 조선 말기였던 19~20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보니
곧바로 일제의 침략이 이어지며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대중문화들이 판소리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버렸고
결국 극장형 대중문화로까지 자리잡기전에 그 전성기가 종료되어 버린 점이 안타까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