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는 16세기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히는 1592년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대첩(1차 진주성 전투)이 있었고, 이듬해 다시 조선을 침공한 왜군에 맞서다 김천일을 비롯한 장수와 관리, 백성들이 장렬하게 순국한 2차 진주성 전투가 이어졌다. 20세기 진주는 옛 가야의 후예들이 벌인 호국항쟁의 명승지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추념 행사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2년 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됐다. 진주성 촉석문 앞 대지에 진주대첩 광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9~10세기 통일신라 말기~고려 초 시기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두개골과 팔뼈, 발목뼈 등 인골 24개체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국내에서 대다수 인골은 고분 등에서 출토되는 데 반해, 이 인골들은 민가 마을이 있었던 성 주변 지역이자 물이 흐르는 옛 도랑에서 나왔다. 누가 봐도 사연이 있는 것들이었다.

인골은 두개골과 몸의 팔과 다리·발 부분 뼈들(사지골)이 분리된 상태로 출토됐고, 두개골 중심으로 성별과 연령을 분석한 결과 여성과 6~11살 소아가 다수를 차지했다. 주목되는 것은 두개골과 아래턱뼈 등에 날카로운 칼로 벤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이다. 몸체와 두개골이 분리된 채 묻히고 이후 도랑에 물이 흐르면서 흩어진 정황 등에서 병기를 지닌 군사들에 의해 참수된 뒤 마구 포개져 묻혔다는 정황이 뚜렷해졌다.
20개체 이상의 인골이 무덤 아닌 유적에서 밀집해서 출토된 국내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학살됐음이 명백한 진주의 나말여초기 여성과 아이들 인골이 무더기로 발굴된 것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살육의 비극이 진주에서 벌어졌음을 일러준다.

어린 소아들의 두개골과 자상(칼로 벤 상처)의 흔적.
경상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연구자들은 인골이 겪은 학살의 비극이 과연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사서기록 등을 통해 찾았다. 8~9세기 진주를 지나간 역사적 격변들을 ‘삼국사기’ 등을 검토하며 살폈다. 과연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인골 매장 시기와 가장 합치되는 사건은 822년(헌덕왕 14)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김헌창이 신라에 맞서 장안국이란 별도의 나라를 세우고 충청·호남은 물론 진주, 김해 등 영남 지역 상당수까지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일으킨 큰 내전 성격의 난이었다. 당시 청주로 불렸던 진주는 김헌창이 다스렸던 임지였고, 반란을 일으킬 당시 무진주, 완산주, 사벌주와 더불어 핵심 근거지로 신라 관군과 대치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신속하게 내려보낸 진압군에 김헌창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반란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스러지고 만다. 신라 조정은 이후 김헌창을 지지했던 진주 등 여러 지역의 호족과 양민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는데, 진주 도심 땅속에서 발견된 자상 입은 인골들은 그때 자행되고 망각된 학살 역사의 생생한 증거인 셈이다.
1200년 전 진주 학살은 21세기에 드러났지만, 이것도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주대첩 광장 아래는 물론 남강로 뒤편 재개발 지역까지 인골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유구가 뻗어 있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앞으로 재개발과 발굴 조사 과정에서 나말여초 시대 숨은 역사들이 계속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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