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제 미니 한 편 해놓고 인터뷰를 한다는 게 부끄러워요.” 그 ‘미니 한 편’으로 방송가가 들썩이고 있다. 입봉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쫄깃한’ 대사는 물론이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내공까지 발휘했다. 이건준 책임피디는 “무서운 작가가 나타났다”고 엄지손가락을 번쩍 든다. 바로, 11일 끝난 드라마 <쌈, 마이웨이>(한국방송2) 임상춘 작가다.

여러 차례 설득 끝에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의 한 찻집에서 작가와 마주했다. 이름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아저씨’일 것이라는 누리꾼들의 추측을 깨고 ‘맑고 따뜻한 소녀’ 같은 30대 초반 여성이 나타났다. 그는 종영 소감을 “시원하지만 우울하다”로 정리했다. “주인공 네명이 모두 너무 착해요. 그 착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느낌이에요.” 시청률 5.4%(닐슨코리아)로 시작해 13%로 끝나며 화제몰이를 했지만, 정작 그는 부족한 것만 보인다.
“특히 분량이 넘쳐 가족이나 남일, 경구, 혜란 등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좀더 풍요롭게 담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함께 자리한 이건준 책임피디는 “드라마 반응도 좋고 재미있는 장면을 잘라내는 게 아까워서 2회 연장을 제안했는데, 작가와 연출이 모두 깔끔하게 끝내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임 작가는 “소소한 이야기여서 처음에는 이걸 좋아할까 걱정했다”고 한다. <쌈, 마이웨이>의 비범함은 그 소소함에서 나온다. 판타지를 덜고 ‘짠내’ 나는 현실을 덤덤하게 담으며 시청자를 위로했다. 특히 면접에서 스펙으로 무시당하는 등 부모의 경제력이 곧 본인의 능력이 되는 현실에서 ‘흙수저’들을 보듬는 장면이 좋았다는 반응이 많다. “흙수저라는 말이 정말 슬픈 건, 그 말을 내 자식이 들었을 때 부모의 마음 때문이다. 그런 속을 드라마에서 풀어주고 싶었다”며 작가는 울컥했다.
그는 “시청자들도 드라마 속 네명의 친구처럼 주변에 든든한 지지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했다. 드라마는 지금 이대로 우리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응원하는 듯이 계속 얘기한다. 주만과 헤어진 설희는 보통 드라마였다면 뽀글 파마를 풀고 예뻐진 뒤 백마 탄 왕자를 만났다.
누리꾼들도 그런 요구가 많았다. 작가는 “설희는 그 자체로 예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설희가 “내 꿈은 엄마”라며 자기 계발 하라는 친구 애라한테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계발 해야 해? 왜 엄마는 꿈으로 안 쳐줘”라고 말하는 장면도 그는 “희생만큼 큰 사랑은 없다. 세상 모든 엄마에게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는지 얘기하고 지지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주만이 재벌 딸을 만나지 않은 것도 “돈보다 무서운 게 정이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고민은 없었을까. “리얼하기만 하고 어두워서 불편한 것은 피했어요. 리얼하지만 그 세계 안에서 이 네 친구는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나게 사는 애들이에요. 항상 밝아요. 걔들이 너무 착한 게 판타지라면 판타지겠죠.”
애라가 “누구보다 빡세게 살았는데 개뿔도 모르는 이력서 나부랭이가 꼭 내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것 같아서”라며 눈물 흘리는 장면 등이 공감을 자아냈다. “대사를 쓸 때 누구나 느끼는 감정들을 담으려고 해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 주변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대사로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관찰하려고 하지 않고, 최대한 그 마음이 되려고 노력해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어요. 내 이야기처럼 분노하고 그랬죠.” 그러면서도 “드라마를 쓰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게 철칙”이라고 했다.

실제 만나본 임 작가는 드라마처럼 사람 자체가 따뜻했다. 그는 “사람은 알고 보면 모두 따뜻하다. 누구나 착한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며 “드라마에서 그걸 계속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 드라마에서 비극은 없을 겁니다. 사는 것도 텁텁한데, 드라마에서라도 항상 행복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쌈, 마이웨이> 마지막회를 앞두고 동만과 애라가 헤어질 거라는 추측이 나왔을 때는 직접 결말을 말해주고 싶었을 정도였다며 웃었다.
그는 직장을 다니다가 20대 후반부터 드라마 작가를 꿈꿨다. “사람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웃는 걸 봤어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드라마를 쓰자고 생각했어요.” 작가교육원 같은 곳도 다니지 않고 대뜸 응모한 <문화방송> 공모전에서 두 편이 최종심사까지 올랐다.
그때 그의 대본을 유심히 본 피디가 추석 특집극을 제안했고, 2014년 <드라마 페스티벌-내 인생의 혹>(문화방송)으로 데뷔했다. 2014년 웹드라마 <도도하라>, 2016년 4부작 <백희가 돌아왔다>(한국방송2)를 썼다. 공모 당시 대본 쓰는 방식도 몰랐다는데, 오히려 틀에 갇히지 않은 자유로움이 그의 색깔로 나타난 듯하다.
그는 “성별도 나이도 없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필명도 다소 낯선 ‘임상춘’으로 지었다고 한다. “저는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드라마로 만들어 제공하는 전달자나 통역사이고 싶어요. 작가로서 나는 지우고 싶어요. 다음에는 다른 이름으로 써볼까도 생각해요.” 인터뷰를 안 하려는 것도, 사진에 얼굴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친한 친구와 가족 외에는 그가 임상춘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단다. “아빠가 자랑하고 싶어 하시는데 못 하게 해요.(웃음)”
장편 신고식을 무사히 치른 그는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아직 어떤 이야기를 쓸지 결정하진 않았지만, 촌스럽고 투박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거예요. 저는 착한 사람들의 소소한 갈등이 좋거든요.” 이건준 책임피디는 “임상춘 작가의 장점은 황당하지 않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다”며 “그는 드라마마다 가족이야기도 중요하게 다룬다. 미니와 주말드라마 모두 가능한 몇 안 되는 작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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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하나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척 잘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응원하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게 청춘이든, 우리 부모 세대든,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도 '잘 살고 있으니 힘내라'고 응원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난 11일 끝난 KBS 2TV 월화극 '쌈, 마이웨이'도 같은 효과를 냈다. 지친 이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슴을 쫙 펴라고 응원했다. "못 먹어도 고(GO)!"를 외쳤고, "사고 쳐야 청춘"이라고 대차게 말했다.
12일 여의도서 만난 작가 임상춘은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자전거에 바람을 넣는 것처럼 사람들을 응원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임 작가는 '쌈, 마이웨이'의 '설희'와 같은 모습이었다. 여리고 하늘하늘한 소녀. 그런 그가 대본에서는 외모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필력을 과시했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이게 첫번째로 쓴 16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다. 방송가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제 겨우 미니시리즈 하나 썼는데 인터뷰를 하면 너무 건방질 것 같다"며 주저하던 임 작가는 그러나 막상 마주하자 흔들림 없는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며 앞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임상춘'이 필명이다. 이 이름만 보고 아저씨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진도 안 찍겠다고 하고, 어디까지 공개할 수 있나.
▲작가가 작품 앞에 있는 게 별로 안 좋은 것 같다. 작가로서 주변의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사람으로 머물고 싶다. 성별과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너무 필명 같아 보이지 않게 지으려 했다. 몇가지 후보가 있었는데 생각할 '상'에 넉넉할 '춘'자를 골랐다. 30대 초반의 여성 작가라는 사실은 제작발표회 때 어쩔 수 없이 알려졌으니 거기까지만 말하고 싶다.
--격투기 선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게 특이하다. 임 작가를 직접 만나니 더욱더 놀랍다.
▲추성훈-야노 시호 부부를 보며 격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야노 시호가 남편의 경기를 보면서 우는 모습에 많이 '찡'했다. 격투기 선수들의 가족에 주목하게 됐고, 어설프게 다루면 안될 것 같아 취재를 많이 했다. 격투기 선수들이 으레 여자 좋아하고 술도 좋아할 것 같지만 사실은 되게 순박하고, 몸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수도승처럼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싶었다. 경기장도 많이 갔고, 경기 영상도 많이 보면서 연구했다. 경기를 차마 지켜보지 못하는 선수 가족들의 이야기가 너무 슬펐다. 경기에서 진 선수가 링에서 나오면서 우는 모습, '닥터 스톱'이 선언되니까 '안된다'며 울부짖는 모습 등이 모두 '짠' 했다.
--4부작 '백희가 돌아왔다'에 이어 '쌈, 마이웨이'에서도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게 인상적이었다.
▲내가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재벌 이야기보다는 내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그리고 싶었다. 나하고 비슷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 백화점 안내데스크 언니('애라'역)들을 보면 되게 예쁘고 목소리도 좋다. 그 언니들을 보면서 꿈이 뭐였을까 궁금했다. 전화 상담원('설희'역)의 경우, 내가 점심을 먹다가 고장 수리 전화를 하게 됐는데 전화를 끊을 때 "고객님 식사 맛있게 하세요"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언니두요~"라고 답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수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상담원이 "고객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더라. 그 말이 정말 '찡'했다. 꿈의 언저리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백희가 돌아왔다'의 '백희'나 '쌈, 마이웨이'의 '애라'는 모두 '걸크러시' 매력을 발산한다.
▲사실 현실에서는 걸크러시를 발산하는 분들이 별로 없지 않나. 대부분 나처럼 말도 잘 못하고 수줍어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라도 그런 인물을 그려냈다. 하지만 예의 없는 걸크러시는 싫다. 꼭 필요할 때, 지켜야 할 사람이 있을 때 똑 부러지게 말할 줄 아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백희가 돌아왔다'의 '백희'와 '쌈, 마이웨이'에서 진희경이 연기한 '복희'가 오버랩되는 등 두 작품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일부러 백희와 비슷한 복희라는 이름을 지었다. 또 '쌈, 마이웨이'에는 '백희'라는 개를 등장시켰다.(웃음) 청춘의 이야기를 해도 가족의 이야기를 같이 쓰고 싶었다. 가족을 항상 중시한다. 복희를 통해 미스터리도 넣고 가족 이야기도 할 수 있었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극중 고등학교 이름이 '천방고'다. 애들이 천방지축인 게 좋다. 앞으로도 고등학교 이름은 '천방고'라고 쓸 거다.(웃음) 동만(박서준 분)의 이름도 아이 '동'자에 천진난만의 '만'자를 붙여서 지었다. 애들은, 청춘은 좀 막 살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모습이 내게는 예뻐 보인다.
--30대 초반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이야기의 넓이와 깊이가 남다르다. 특히 '백희가 돌아왔다'는 상당히 '걸쭉'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랑 많이 지냈는데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음식장사를 하셨는데 같이 장도 보러 다니고 마실도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굉장히 따뜻한 분이셨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으셨다. '백희가 돌아왔다'를 보시고 돌아가셨는데 손녀가 쓴 작품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다.
--혜성같이 등장했다. 어떻게 드라마 작가가 됐나.
▲나도 '쌈, 마이웨이' 주인공들처럼 그냥 흘러가듯 살았다. 회사 생활 비슷하게 하다가 20대 후반에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정말 드라마를 많이 본다. 늦은 밤 버스를 타면 다들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며 즐거워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딴 거 필요 없고, 그저 좀 유쾌하고 편안한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 교육을 받지 않아 대본을 많이 구해서 혼자서 공부를 했고 MBC 드라마 공모에 응모한 게 인연이 돼 단막극 '내 인생의 혹'으로 데뷔하게 됐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을 정말 좋아한다. 우리 주변의 '달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이 사실은 엄청난 일이다. 그런 이야기가 좋다.
쌈마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터뷰한듯
사람들을 응원하는 글을 쓸거라는건 여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