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
그래,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수록 왜 연이 높이 나는지.
바람 속을 걷는 법, 이정하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존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생각이 나서, 황경신
누군가 너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거야
그 애는 나의 제목같은 사람이라고
모든 걸 제치고 언제나 맨앞에 놓일 문장이라고.
제목, 하현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황인숙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현실이 미래를 잡아먹지 말 것
미래를 말하며 과거를 묻어버리거나
미래를 내새워 오늘 할 일을 흐리지 말 것
경계, 박노해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묘비명, 김광규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누군가는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 게 잊힌 과거야
음력, 심보선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실패를 살아가는 직업, 요조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프란츠 카프카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알려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바다와 나비, 김기림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The Virtues of Aging, 지미 카터
차 막히고, 애인 기다리고, 슈퍼마켓 가서 줄 서고, 영화 관람 기다리는 게 버리는 시간이 아니에요. 진짜 버려지는 시간은 누구 미워하는 시간입니다.
찌끄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김창완
Done is better than good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잘해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무언가를 시작하고 완성해내는 것이 어려워진다.
어릴 때는 별 생각없이 하던 도전도 나이가 들면서 심사숙고 끝에 포기하는 일이 잦아진다.
생각만 하다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어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일도 흔해졌다.
‘good’인지 고민하다가 ‘done’을 놓치는 것이다.
빅 매직, 엘리자베스 길버트
(필사하기 좋은 구절, 시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