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하이퍼나이프'에서 박은빈이 연기하는 세옥은 그간 그가 보여준 어떤 인물보다도 생경하다. 선을 넘지 않고 품위를 잃지 않던 박은빈 특유의 이미지가 이번엔 완전히 거세된다. 대신 피 냄새와 날 선 메스를 품은 한 사람의 비릿한 내면을 격렬하게 껴안으며, 그간 쌓아온 정숙함의 외피를 스스로 찢는다. 그 안에서 드러나는 건, 분노 앞에 자제라는 감각을 잃어버린 철저히 본능과 충동으로 움직이는 아주 어마어마한 여자다.
세옥은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성보다 빠른 건 감정이고, 감정보다 빠른 건 손이다. 그의 분노는 밀도 높게 축적되지 않는다. 대신 폭발처럼 튀어나온다. 그에게는 복잡한 심리적 계산도, 전략적인 대사도 없다. 대신 눈빛 하나에 살기가 담기고, 발끝의 방향만으로도 살의를 드러낸다. 자신을 방해하거나 통제하려는 이가 있으면 그는 주저 없이 목숨을 겨눈다. 살인을 서슴지 않는 극단의 사이코패스 성향,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이끌리는 외과적 본능. 박은빈은 이 상반된 에너지를 고르게 분산하지 않고, 정면에서 충돌시키며 연기한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성으로 가득하고, 그것으로부터 극과 캐릭터에 팽배한 긴장감을 실어넣는다.
놀라운 건,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어되지 않은 듯한 연기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박은빈은 마치 억제라는 개념 자체가 삭제된 사람처럼, 세옥이라는 인물의 광분을 몸과 눈, 호흡 전체로 뿜어낸다. 절제와 균형으로 대표되던 그가, 이번엔 오히려 균열과 일탈의 얼굴로 화면을 지배한다. 말간 미소에 살의를 담고, 사슴 같은 눈망울에 살기를 싣는다. 차갑지만 뜨겁고, 잔혹하지만 격정적이다. 이건 더 이상 변신이 아니다. 배우로서 한계선을 완전히 넘어서 버린 박은빈의 연기적 해방에 가깝다.
그렇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박은빈이 철저한 리서치와 세심한 감정 설계로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인물을 감동적으로 빚어냈다면, '하이퍼나이프'의 그는 감정의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인물의 트라우마와 집념을 설득해 낸다. 손끝에 실려 있는 외과의사의 긴장감, 시선을 던지는 방식 하나로 뒤틀리는 내면. 그는 세옥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옥으로 살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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