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빙과 웨이브의 합병 논의가 16개월째 제자리걸음을 이어가며 국내 OTT 산업의 불확실성이 고조되고 있다. 2023년 12월 CJ ENM과 SK스퀘어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출범을 예고한 '토종 최대 OTT'의 미래가 기약 없이 미뤄지는 가운데, 2대 주주 KT의 입장이 사실상 '캐스팅 보트(casting vote)'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CJ ENM과 KT의 입장차
21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CJ ENM은 합병을 통해 티빙과 웨이브를 묶어 콘텐츠 제작력과 플랫폼 운영 역량을 동시에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OTT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몸집 불리기'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이다.
CJ ENM 관계자는 "지상파 콘텐츠 수급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웨이브와의 합병은 콘텐츠 수급과 가입자 확대 모두에 전략적 시너지가 있다"고 밝혔다.
반면, 티빙의 2대 주주인 KT스튜디오지니는 합병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KT는 티빙 지분 13.54%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CJ ENM이 주도하는 합병 구도에서 KT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도 내부적으로 존재한다. KT 측은 "합병으로 KT가 실질적으로 어떤 실익을 얻을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보는 중"이라며 "단순한 지분 통합 이상의 전략적 가치가 없다면 합병에 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양사 간 콘텐츠 전략과 경영권 배분 문제도 걸림돌이다. KT는 자사 계열사인 ENA 채널과 콘텐츠 IP에 대한 활용권을 확보하는 것을 중시하는 반면, CJ ENM은 티빙을 중심으로 한 통합 OTT 주도권을 요구하고 있다. CJ ENM과 KT 간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논의는 계속 지연되고 있다.
◆ 글로벌 전략 공백 우려
이러한 상황에서 웨이브의 글로벌 플랫폼 사업을 맡아온 박근희 웨이브아메리카스 대표가 올해 3월 사임하면서 글로벌 전략 마련에도 공백이 생겼다.
박 대표는 웨이브아메리카스 창립 멤버로서 최고기술책임자(CTO)로 2017년 K콘텐츠 글로벌 유통 플랫폼 '코코와'를 개발하고 2018년 대표 자리에 올라 회사를 이끌었다.
웨이브아메리카스는 미국,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등 총 73개국에서 코코와를 운영 중이며, 유료 가입자는 100만명에 달한다. 박 대표의 사임으로 인해 티빙과 웨이브의 글로벌 진출 전략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OTT 시장 환경과 향후 전망
OTT 시장 환경도 악재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4 방송매체 이용행태조사'에 따르면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점유율이 각각 72.7%, 36.0%로 압도적인 반면, 티빙은 14.8%, 웨이브는 6.9%에 그쳤다.
콘텐츠 품질과 사용자 환경에서 열세인 토종 OTT로서는 합병을 통해 체급을 키우지 않으면 글로벌 플랫폼에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지상파 방송사들의 콘텐츠 전략 변화도 합병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최근 SBS는 넷플릭스와 6년간 독점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MBC는 쿠팡플레이에 주요 예능과 드라마를 집중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로 인해 웨이브가 보유한 지상파 콘텐츠의 독점성이 약화되고, 티빙 입장에서는 합병의 실익이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조율 필요성도 제기된다. 국내 콘텐츠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공공의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구조로는 모두가 만족하는 합병이 어려워 보인다"며 "방송통신위원회나 공정거래위원회가 중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이 장기화되면서 국내 OTT 시장의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글로벌 OTT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합병을 통한 규모의 경제 실현과 콘텐츠 경쟁력 강화가 절실하다. 주요 주주 간의 입장차 조율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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