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제와 서상돈
이 둘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1898년 서상돈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규탄하였다. 1899년을 전후로 해서 서상돈과 천주교 신자들은 대구 읍내 곳곳에 학당을 설립하였으며 계산성당 교육관 내 한문 서당인 해성재(海星齋)의 건립도 지원하였다고 한다.
1902년 6품으로 탁지부 재무관에 임용되었으며, 이어 경상남북도 검세관에 임용되었다. 1903년에는 정3품으로 경상남도 시찰에 임용되었다가 곧 해임되었다. 1904년에는 경상남북도 검세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05년에는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정식 사립 학교로 인가받은 대구 지역 대표 여학교인 달서여학교의 설립에 적극 관여하는 등 근대 교육 발전에 힘썼다.

금연을 해서 모은 돈으로 나라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호응이 뜨거웠다. 일제는 언론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간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고 누명을 씌워 1908년 7월 21일 구속했다. 양기탁은 9월 29일 무죄로 석방되지만 그 사이 국채보상운동은 활기를 잃고 시들어버렸다.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국채보상운동 실패 후 사업에 몰두하며 실의속에 사망한 서상돈의 묘소는 수성구 범안로 120, 즉 범물동 산227-1의 천주교 모역 안에 있다. 본래 달성군에 있었는데 1974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돈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아들인 서병조는 아버지가 사망 후 경상농공은행, 대동무역주식회사, 조양무진주식회사, 대구제사주식회사, 경북무진주식회사 등을 설립하거나 중역을 역임했던 대표적인 자본가’로서 일본인과 조선인 자본가로 구성된 대구상업회의소와 대구상공회의소의 특별회원이었으며, 일제의 지방행정기관의 자문기구였던 대구부 협의회 회원과 경북도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관변단체인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경북위원, 제국 재향군인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된 대구자제단 발기인 겸 평의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서 동민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등 각종 친일단체에 가담하였다. 사상범 감시와 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는 대구지부장을 맡았고, 조선인은 임명되기 쉽지 않은 대구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로도 활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3월 2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왜 이렇게 다를까? 서상돈 묘소와 고택을 찾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물론 사람은 모두가 개체이니 부자간이든 형제자매간이든 서로 정체성이 다르다. 하지만 달라도 너무나 다를 때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