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후손 1,177명 가운데 268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22.8%다. 연세대학교 68명, 고려대학교 51명을 합치면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물론 이 1,177명은 각종 검색 작업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SKY 출신이 ⅓ 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단순한 개인적 재능 이상의 배경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는 역대 총장 가운데 3명이 친일파 후손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의 전현직 교수 36명도 친일파 후손으로 조사됐다. 단일 대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다.
친일 후손들의 화려한 학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아니 현대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확실한 보증 수표는 명문대 졸업 경력과 선진국 유학의 조합이다. 그래서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조사해 봤다. 결과는 1,177명 가운데 319명, 비율로는 27%였다.
우리 사회에서 유학을 경험한 사람들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통계청에도 해당 자료는 없다. 다만 연도별 유학생 출국자들의 숫자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한 해 유학생이 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많게 잡아서 천 명이라고 치면, 50년대와 60년대를 통틀어 20년 동안 유학을 경험한 인구는 2만 명 정도 되는 셈이다. 70년도 당시의 인구가 3천 2백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70년대 이전까지 유학을 경험한 사람은 전체 인구 대비 0.06%에 불과하다. (1971년부터 2000년까지 유학생 출국 숫자는 모두 125만 명이다. 2000년 당시 인구가 4천 7백만 명이므로 2000년 시점에서 그 이전 30년 사이 유학을 경험한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2.6%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친일파 후손들의 유학 국가를 보면 전체의 64%가 미국이었다. 두 번째로 많은 국가는 17%를 차지한 일본이었고 독일, 프랑스, 영국이 뒤를 이었다. 일본 유학의 경우 80% 이상이 해방 전 세대였다.
신원이 확인되는 친일 후손 1,177명의 명단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직업 분석을 시작했다.
“이거 재미있네요. 의사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확인해보니 1,177명 가운데 의사가 147명이다. 정치인이나 법조인, 공직자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던 취재팀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의사가 이렇게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친일 후손들의 경우 선조의 친일이라는 흠결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나 공직자처럼 선대의 이력이 노출되기 쉬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를 지향하기보다는 비정치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정치적인 변화에 영향받지 않으면서도 일정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의사라는 직업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 중 하나는 아마 왕이나 대통령의 주치의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주치의는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사로 인식되기 때문에 대통령 주치의 교체 시기가 되면 서울대 의대나 연세대 의대 같은 대표적 학교들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의사로서의 최고 명예직인 대통령 주치의는 역대 16명뿐이었는데, 이 가운데 2명이 대통령 소속 반민규명위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후손이고, 또 다른 2명은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간 친일파의 후손으로 확인됐다.
친일파 후손의 직업 중 가장 많은 것은 기업인이었다. 376명으로 전체의 32%였다. 이 기업인 가운데 1/3 이상은 상장기업의 대표나 주주, 임원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기업 330만 여 개 가운데 상장기업은 2천 개가 채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우는 친일파 김신석의 외증손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가문이다. 또 친일파 김연수가 설립한 가족기업 삼양사의 경우 전현직 대표나 임원 가운데 김연수의 후손이 12명이나 있었다. D그룹의 총수, S 건설의 회장 역시 친일파의 후손으로 드러났다. 친일 후손 중 상무 이상의 임원만 따져도 80명이 넘었다. 삼성, LG, 현대, SK 계열사에 적어도 한 명씩은 모두 있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영역을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 즉 정치인과 법조인, 공직자, 언론인은 각각 31명, 30명, 55명, 46명이었다.
우리 사회의 파워 엘리트 직군에 진출한 친일파 후손들은 전체 친일 후손의 14% 정도였다. 취재진의 예상을 밑도는 수치였다. 이는 “친일파 후손들이 여전히 우리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속설과도 다른 분석 결과다. 특히 이들 파워 엘리트의 비율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낮아졌다. 과거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 시절만 해도 총리나 장관, 고위 법조인 중 상당수가 친일파 후손이었지만 90년대 이후부터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는 선대의 이력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정관계로 굳이 진출할 필요는 없었고, 자본 권력이 사실상 정치 권력을 지배하게 되면서 기업 경영이나 금융 분야 선호도가 높아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친일파 후손 중 언론인들은 이른바 ‘조중동’과 KBS에 소속된 비율이 높았다. 조선일보 9명, 중앙과 동아는 8명, KBS는 6명으로, 이들을 합치면 언론인의 2/3를 차지한다. 언론인 가운데는 지상파 방송의 앵커 출신 언론인도 있었고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언론인도 있었다.
친일파 후손들의 직업 분석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사회의 최상위 계층에서 활약하는 ‘잘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비율이 높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취재과정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떠올라 씁쓸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