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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원문가 다른 번역은 엉망인가? 질문에 황석희 번역가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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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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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msRS


종종 들어오는 질문이라 써볼게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반했을 때 헤르메스가 이를 눈치 채고 이렇게 말해요. “가서 말 걸어보렴. 너무 서두르지 말고.” 그때 오르페우스가 하는 첫 마디는 “나와 함께 내 집으로 가요(come home with me)” 한국어 대사론 “결혼해요”로 번역됐어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의미 혼동 -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집에 가요”라고 네 글자만 말하면 대개는 “나와 함께 집으로 가요(come home with me)”가 아니라 “(당신)집에 가요(Go to your home. Go home.)”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아닌데?라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지식의 저주’ 혹은 ‘저주받은 지식의 오류(The Curse of Knowledge)’라는 게 있어요. 특정 지식이나 개념이 나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이를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인지편향. “집에 가요”가 “나와 함께 내 집으로 가요”로 들린다면 ‘하데스타운’의 플롯에 이미 익숙해진 까닭일 가능성이 커요. 생각해보세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집에 가요”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객의 의미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go home”으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쓰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우리 집에 가요”라고 할 수도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럼 첫 박, 음표 하나를 세 음절로 나눠야 해요. 그게 얼마나 촌스럽고 어색한지는 잘 알 거예요.

둘째, 코믹 릴리프(Comic relief) - 코믹 릴리프는 극의 긴장을 완화하거나 늘어진 분위기를 띄울 때 사용되는 장치예요. 아무리 처절하고 우울한 비극이어도 코믹 릴리프는 거의 필수적으로 들어가요. 심지어 ‘햄릿’에도 있으니까요. 코믹 릴리프는 극의 리듬을 살리는 극작의 전통적인 요소예요. A가 “ㅇㅇ하지 마라”라고 말하면 B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건 아주 전형적인 코믹 릴리프예요. 관객들을 여기서 웃겨야 해요. 이걸 날리면 리듬이 처음부터 어그러져요. “집에 가요”라는 번역문은 코믹 릴리프로 기능하지 않아요.

셋째, 연기 -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에게 “come home with me”라는 대사를 하면 에우리디케는 “누구세요?”라며 당황하고 황당해하는 반응을 해야 해요. 세상을 불신하는 에우리디케는 “누군데 갑자기 자기 집으로 가자는 거지?”라며 방어적인 연기를 해야 해요. 그런데 대사가 다짜고짜 “집에 가요”일 경우에 문맥에 맞는 연기가 어려워요. “go home”으로 들리는 대사에 “come home with me”처럼 반응하기가 어렵다는 거죠. 프로 배우들이니 연습으로 극복 가능하지만 배우가 느끼는 이질감은 그대로 남아요.

넷째, 원작자의 의향 - 번역극은 원작자의 의향이 아주 중요해요. 번역가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원작자, 혹은 원작자를 대리하는 해외 연출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해요. 가령 ‘원스’에서도 제가 쓰고 싶었지만 연출자와 의견이 달라 쓰지 못한 것들이 있어요. ‘하데스타운’은 모두 원작자인 아나이스 미첼과 대면으로 논의하고 동의를 거쳤어요. 특히나 “come home with me” 같은 구절은 워낙 중요한 부분이라 원작자의 의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고요. 뒷 부분에도 중요하게 나오는 대사거든요. 미첼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논의한 끝에 동의와 허락을 받은 번역문이에요. 원작자가 동의한 번역문보다 권위를 갖는 번역문은 없어요.

“come home with me”를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가요”로 번역해도 된다면 얼마나, 정말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요. 노력한 번역이든 뭐든 간에 그거야 제 사정이고 저게 마음에 안 들 수 있어요. 너무 당연히도. 저 번역문이 끔찍이 싫을 수도 있고 혐오스러울 수도 있고, 뭐든 괜찮아요. 감상하는 사람 마음이죠. 그런데 저 번역문이 싫은(dislike) 걸 넘어 틀렸다고(wrong) 주장하려면 상술한 네 가지 요소를 전복할 근거와 논리와 권위가 필요해요. 내가 싫으니까 틀렸다는 거 말고.

아마 어떻게 말해도 설득되지 않을 거예요. 특히나 번역 비평은 감성에 지식까지 포함된 영역이라 어간해선 틀림을 인정하지 않아요. 에고의 영역이거든요. 저도 논리적으로 제 번역문이 옳다고 주장할 순 있지만 제 번역문을 무조건 좋아해야 한다고 주장할 순 없어요. 그건 엄연히 취향의 영역이니까. 싫은 사람은 끝까지 싫을 거예요.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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