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안알려져서 그렇지 우리는 무조건 폭군이다라는 생각만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음
다음은 연산군이 백성들을 친히 챙겨줬다는 기록들이야 말년 2년 전의 10년동안의 연산군







- 말기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재위기간이 긴 편이다. 약 12년 집권했으며
본격적 개막장 시기는 말기 2년에 집중
- 명나라에서 조공요구와 지원군 파견 요구가 없었던 시기였고
해안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략도 없었던 시기였으며 내내 농사는 풍년이었다고 한다
- 아버지 성종을 닮아 키는 컸지만
조선 왕중에 드물게 체형이 슬렌더 였다고,
엄마를 닮아 꽃미남 st 얼굴이었다고 함
- 처용무를 잘 췄다고 한다
- 재위 초중반까지는 할머니 인수대비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자순대비와 인수대비에게 효성이 지극했다
(상당히 많은 지원금이 두 대비전에 들어갔는 데 신하들이 줄이라고 하니까 줄일 수 없다고 거부함)
또한 인수대비는 폐비윤씨가 사사된 그 시점에도 단호하게 연산군이 폐세자 되지않도록 노력했다.
(연산군이 한 기생에게 인수대비에게 보여줄 것이니 춤을 익히라고 하고 인수대비 앞에서 춤을 추게했음
이어 인수대비가 그 기생을 따로 불러서 춤을 추게 함)
- 부인 폐비신씨와도 무척 사이가 좋아 다복했고
(5남 3녀를 낳았음)
개막장 말년 시기에도 유일하게 연산군 앞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게 폐비 신씨 였다고 함
(어지간한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참수행)
장녹수도 총애받았지만 폐비신씨만큼은 아니었음
죽기전에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함
- 계모 정현왕후 소생의 진성대군 (훗날 중종)을
동생으로 예뻐했다고 함. 그래서 중종반정 때
진성대군을 옹립한다고 할 때 순순히 물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