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된 지 1년1주일 만에 돌아온 선원들은 꿈에 그리던 가족들부터 만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맞은 것은 대공 수사관들이었다. 어부들은 속초시청 3층에 마련된 조사실에 감금됐다. 납북 경위나 북에서 겪은 고초 등에 대한 객관적 조사를 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안당국은 모든 납북 어부를 ‘자진 월북’으로 못 박으면서 강도 높은 취조를 벌였다. ‘북에서 무슨 공작교육을 받았고 어떤 지령을 받고 돌아왔는지’ 모두 털어놓으라며 윽박질렀다. 납북 어부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반공법·국가보안법·수산업법 위반 등이었다. 일부 어부들은 그중 한두 개의 죄목으로 처벌받았다. 김성학씨는 국가보안법상 잠입탈출죄를 적용받아 구속 기소됐다. 재판 끝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하지만 부친인 김종인 선장은 징역 2년 형을 마치고 나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성학씨가 석방된 뒤 그와 가족에 대한 극심한 사찰이 뒤따랐다. 어디를 가든 신고해야 했고, 감시와 미행이 붙었다. 그 와중에도 김씨는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방위 제대 무렵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에서 김성학씨를 찾아와 ‘HID 요원(북파공작원)’으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김씨가 망설이자 회유와 협박을 병행했다. “너는 평생 사찰을 받고 살아야 할 운명인데 우리랑 같이 일하면 사찰을 면제해주고 적잖은 돈도 벌게 해주겠다.” 결국 김씨는 HID에 끌려가듯 입대해 성공적으로 북파공작원 교육훈련을 마쳤다. 교육훈련 종료 이후엔 정보사의 배치를 받아 2년 동안 모범적으로 근무한 뒤 사회로 복귀했다. 하지만 정보사의 약속과 달리 김씨에 대한 사찰은 멈추지 않았다. 정보사 퇴직 후 김씨가 어렵사리 취직해 다니던 회사에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사장에게 그의 신분을 알리는 바람에 해고당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김성학씨는 1980년대 초에 결혼을 하고 ‘보통 사람’으로서의 일상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처가의 도움으로 경기도 하남시에 둥지를 틀고 대우전자 지역 대리점을 차려 악착같이 일했다.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이럭저럭 자리를 잡고 첫딸도 낳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인 1985년 12월2일, 또다시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맞았다. 당시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김씨를 ‘훌륭한 먹잇감’으로 점찍은 것이다. 이날 그는 이근안의 부하들에게 납치되었다. 감금된 장소는 인천에 설치되어 있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 지하였다. 이근안은 김성학씨에게 다짜고짜 간첩 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이유도 근거도 없었다. “넌 무조건 간첩이어야 돼.” 이 말 한마디를 끝으로 구타와 고문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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