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입법기구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계엄 선포 이후에 비상입법기구를 창설할 의도가 있었습니까.” "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지난 18일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에서 차은경 서부지법 부장판사는 5분간 최후 진술에 나선 윤 대통령에게 이같이 물었다. 5시간에 걸친 심문 절차에서 재판부가 윤 대통령을 지목해 던진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이었다. 윤 대통령은 앞선 공수처 조사 때와 달리 이날은 양복에 타이까지 착용한 채 심사에 출석했다.
비상입법기구는 12.3 비상계엄 선포 직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윤 대통령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전달한 쪽지에 담긴 내용이다. 12·3 비상계엄이 위헌적 국회 해산을 목적으로 했다는 핵심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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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재판부 질문에 얼마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쪽지는) 김용현이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게 윤 대통령의 대답이었다. 이어 “비상입법기구를 제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계엄을 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식으로 대충 선포하고 국회에서 해제 요구안이 가결된다고 순순히 응하고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재판부는 재차 “비상입법기구가 국회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이냐. 정확히 어떤 성격이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비상계엄 선포 직전의 긴박한 상황에서 ‘최후 지시’처럼 내린 비상입법기구 창설의 의도를 부인하는 것은 물론 쪽지 작성 책임마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떠넘기는 듯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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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상입법기구 창설의 경우 그 의도 자체가 국헌 문란에 가깝다. 비상입법기구를 창설·운영한다는 것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기능 마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판부가 국회·선관위 장악이나 정치인 체포조 운용 등 정황이 상당 부분 드러난 범죄 혐의 이외에 비상입법기구만을 짚어 물은 것은 내란죄 성립 여부를 1차적으로 판단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윤 대통령 측은 비상입법기구 창설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 측은 비상입법기구와 관련한 중앙일보 질의에 “대통령은 최상목에게 그런 쪽지를 건넨 사실이 없다”며 “최상목 본인이 국무회의 도중 뛰쳐나갔다고 하는데 언제 쪽지를 줄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영장실질심사에서 수사기관이 확보한 군·경 지휘부의 진술에 대해서도 책임 회피로 일관했다. 특히 계엄 당시 여인형(방첩)·이진우(수방)·곽종근(특전) 사령관 등에게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끌어내라”“국회의원들 다 체포해” 등의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에 대해선 “내 수사경험에 비춰보면 이들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령관들이 본인의 법적 책임을 축소·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통령인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은 심사에서 “국회의 탄핵소추로 대통령직이 직무정지가 된 만큼, 불구속 수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공수처 검사 측은 “헌법재판관 임명 이후 대통령실 고위 참모들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고, 대통령경호처를 동원해 영장 집행을 막는 등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취지로 구속 수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검사 측은 지난해 12월 12일 윤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에 모두 하나가 되어주시길 간곡한 마음으로 호소드린다”는 내용의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등 결집을 강조한 이후 김용현 전 장관이 진술을 거부한 것 역시 윤 대통령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정황으로 내세웠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인 김홍일 변호사는 영장실질심사에서 한 시간 가까이 직접 프레젠테이션(PT)을 하며 계엄을 선포한 배경 중 하나로 “하이브리드 안보위협”과 “야당 발목잡기”를 꼽았다. 북핵을 비롯한 전통적 안보 위협에 더해 해킹과 사이버전 등 비군사적 수단을 활용한 안보 위협까지 거세진 상황에서 야당의 방해로 안보 공백이 커지며 계엄 선포가 불가피했다는 게 김 변호사의 주장이었다.
검사 측은 구속 사유인 도주 및 증거인멸 가능성을 소명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우선 도주 우려에 대해선 “피의자가 관저에서 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은신하고 있는 것 역시 도주 우려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증거인멸의 경우 “텔레그램 계정을 삭제했고, 계엄 이후에도 김용현 등을 만났는데 말 맞추기를 했거나 증거 인멸을 교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구속 수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법원은 심사 이튿날인 19일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며 윤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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