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또다른 내가 또다른 너를 만난다
5,228 10
2025.01.07 00:57
5,228 10

VbTcck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년)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 함께 최고의 일본 성장영화로 손꼽을만합니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한 이 작품은 열네살 소년들의 어두운 성장기를 무척이나 서정적이면서 공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 유이치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호시노가 어느날인가부터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그의 패거리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돈을 뺏기기 일쑤고 심지어 벌거벗겨진 채 자위행위를 강요당하기까지 합니다.


유이치가 유일하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곳은 인기 가수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입니다. '필리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던 유이치는 웹 상에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던 '푸른 고양이'와 릴리의 콘서트장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콘서트장 앞에서 푸른 고양이를 찾던 유이치는 깜짝 놀랍니다. 그는 바로 호시노였으니까요.

현실에선 지독한 가해자와 처참한 피해자였던 두 사람이 인터넷 공간에선 마음을 나누는 영혼의 동반자란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은 팬 사이트에 들어갈 때만 그저 착한 척 고통받는 척 외로운 척 연기했을 뿐일까요. 현실의 공간만이 진짜 세계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가상 공간에서 푸른 고양이와 필리아가 나눈 우정은 허망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진창 같은 실제 삶에서 벗어나 안식을 얻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여기서 날 데려가 줘요"라고 아프게 외치는 필리아에게 푸른 고양이가 "나는 알 수 있어요. 왜냐면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니까요"라고 공감을 통해 위로를 건넬 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그 교류는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그 어떤 대화보다도 진실합니다. 실제 삶에서 광포하다고 해서 웹에서 착하고 진실한 호시노가 위선적인 것은 아니지요. 호시노 역시 어두운 성장의 터널을 기어서 고통스럽게 지나가는 가여운 아이일 뿐이니까요.

유이치와 호시노의 실제 관계도, 필리아와 푸른 고양이의 인터넷상의 관계도, 모두가 리얼한 관계입니다, 단지 세계가 하나가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뜩 일그러진 '이곳'이 아니라 취향과 공감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어할 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공간이란 오로지 그 안을 채우는 것을 통해 의미를 가질 뿐이지요. 어떤 이들에겐 열어젖힌 마음의 내용물을 쏟아부은 사이버 스페이스가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욱 현실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부대끼느라 실망하고 지치기 쉬운 현실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가볍게 마음 하나만을 밀어넣어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계가 때때로 더욱 절실할 수도 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난 여기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릴리 팬 사이트의 글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이곳'에 무거운 몸을 담은 채 '저곳'에 마음을 부려놓은 사람의 상황은 언뜻 분열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자아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세상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는지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12/2006101260650.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0)
댓글 1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코스알엑스 체험단 100명 모집💙 신입 코스알엑스 보습제 더쿠 선생님들께 인사드립니다! 360 00:01 7,534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724,661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6,440,350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604,579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821,02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6 21.08.23 6,698,492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3 20.09.29 5,624,708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94 20.05.17 6,363,887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8 20.04.30 6,666,044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1,696,513
모든 공지 확인하기()
2690222 기사/뉴스 태연, 도쿄 아레나 공연 전면 취소…“장비 도착 안해” 황당한 이유 11:46 86
2690221 기사/뉴스 이순신 장군 흔적 따라 산책투어…여수시, 매주 토요일 진행 11:45 85
2690220 유머 코난이 투나잇쇼를 떠나며 남긴 말 3 11:45 470
2690219 이슈 우리 불매는 하지 말아요...작가님들 거의 다 유료 쿠키로 수입보시는데 불매하면 애꿎은 작가님들만 힘들어요... 2 11:44 569
2690218 기사/뉴스 권성동 "국민의힘 폄하 보도 계속되면 비상한 조치 취할 것"  22 11:44 319
2690217 이슈 문자 보낼때 참고하라는 정청래 페이스북 9 11:43 670
2690216 이슈 [기안장] 방탄 진이 눈뜨자마자 이불정리하는 모먼트를 좋아하는 사람 11:43 392
2690215 이슈 고소영 샤넬걸 시절 2 11:43 842
2690214 기사/뉴스 [속보] 법원 "尹 요청 시 지하출입 허용"… 오후 8시부터 일반 차량 출입 전면 금지 11 11:42 332
2690213 기사/뉴스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관 퇴임..."재판관 구성 다양화해야" 11:42 146
2690212 기사/뉴스 은지원 숨겨진 가정사 뭐길래 “부모 있을 때 잘하란 얘기 뼈아파”(살림남) 6 11:41 665
2690211 이슈 블라인드 뒤집어진 프로포즈 후기 43 11:40 2,189
2690210 유머 반박할 수 없는 한국인 특징 4 11:40 630
2690209 이슈 [바로이뉴스] 퇴임사 통째로 외워 소회 밝힌 문형배 "다양성과 대화, 결과 존중 있기를" 1 11:40 222
2690208 이슈 온앤오프가 춤 보고 극찬했다는 신인 걸그룹...jpg 2 11:38 588
2690207 이슈 진보 정권 들어서면 또 봐야하는 꼬라지 (feat. 의료개혁) 30 11:35 1,620
2690206 이슈 일부 지역은 여름 오픈한 오늘자 전국 날씨.jpg 11 11:34 1,256
2690205 이슈 [포토] 문형배·이미선 퇴임…헌재 앞에서 마지막 기념촬영 41 11:34 2,653
2690204 기사/뉴스 헌법재판관 [문형배·이미선 퇴임사 전문] "견제와 균형"... "주권자 명령" 3 11:34 458
2690203 유머 한국의 화폐단위는 냥이었다! 5 11:33 1,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