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또다른 내가 또다른 너를 만난다
9,862 10
2025.01.07 00:57
9,862 10

VbTcck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년)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 함께 최고의 일본 성장영화로 손꼽을만합니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한 이 작품은 열네살 소년들의 어두운 성장기를 무척이나 서정적이면서 공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 유이치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호시노가 어느날인가부터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그의 패거리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돈을 뺏기기 일쑤고 심지어 벌거벗겨진 채 자위행위를 강요당하기까지 합니다.


유이치가 유일하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곳은 인기 가수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입니다. '필리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던 유이치는 웹 상에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던 '푸른 고양이'와 릴리의 콘서트장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콘서트장 앞에서 푸른 고양이를 찾던 유이치는 깜짝 놀랍니다. 그는 바로 호시노였으니까요.

현실에선 지독한 가해자와 처참한 피해자였던 두 사람이 인터넷 공간에선 마음을 나누는 영혼의 동반자란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은 팬 사이트에 들어갈 때만 그저 착한 척 고통받는 척 외로운 척 연기했을 뿐일까요. 현실의 공간만이 진짜 세계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가상 공간에서 푸른 고양이와 필리아가 나눈 우정은 허망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진창 같은 실제 삶에서 벗어나 안식을 얻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여기서 날 데려가 줘요"라고 아프게 외치는 필리아에게 푸른 고양이가 "나는 알 수 있어요. 왜냐면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니까요"라고 공감을 통해 위로를 건넬 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그 교류는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그 어떤 대화보다도 진실합니다. 실제 삶에서 광포하다고 해서 웹에서 착하고 진실한 호시노가 위선적인 것은 아니지요. 호시노 역시 어두운 성장의 터널을 기어서 고통스럽게 지나가는 가여운 아이일 뿐이니까요.

유이치와 호시노의 실제 관계도, 필리아와 푸른 고양이의 인터넷상의 관계도, 모두가 리얼한 관계입니다, 단지 세계가 하나가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뜩 일그러진 '이곳'이 아니라 취향과 공감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어할 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공간이란 오로지 그 안을 채우는 것을 통해 의미를 가질 뿐이지요. 어떤 이들에겐 열어젖힌 마음의 내용물을 쏟아부은 사이버 스페이스가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욱 현실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부대끼느라 실망하고 지치기 쉬운 현실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가볍게 마음 하나만을 밀어넣어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계가 때때로 더욱 절실할 수도 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난 여기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릴리 팬 사이트의 글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이곳'에 무거운 몸을 담은 채 '저곳'에 마음을 부려놓은 사람의 상황은 언뜻 분열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자아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세상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는지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12/2006101260650.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0)
댓글 1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라카 X 더쿠💗 립밤+틴트+립글로스가 하나로?! 컬러 장인 라카의 프루티 립 글로셔너 체험단 모집! 886 12.19 66,619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4,363,814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1,073,598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2,404,105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4,390,006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07.22 1,013,081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1 21.08.23 8,454,380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66 20.09.29 7,382,360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590 20.05.17 8,579,020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12 20.04.30 8,469,417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289,533
모든 공지 확인하기()
2942789 이슈 크리스마스 클래식 추천합니다 1 07:44 333
2942788 유머 내년부터 소비 줄이기 위한 꿀팁🍯 3 07:43 1,015
2942787 이슈 [흑백요리사2] 팀전에서 흑수저팀 캐리했다는 반응 많은 (의외의?) 참가자 29 07:25 3,072
2942786 정보 일본 남성끼리 연애 리얼리티 Netflix 「더 보이프렌드 시즌2」2026년 1월 13일 전달 키 아트 & 예고 & 멤버 소개 7 07:20 1,066
2942785 이슈 인스타 금수저 무물 답변 레전드.jpg 10 07:10 3,341
2942784 정보 일본 한류 붐의 원점「겨울연가」4K 극장판이 되어 컴백! 「영화 겨울연가 일본 특별판」2026년 3월 6일 공개 3 07:09 301
2942783 기사/뉴스 장민호·박세리·김종민·박경림, 자립준비청년들 ‘인생 멘토’로 뭉쳤다! (자립준비청년에게 희망을 “넌 혼자가 아니야”) 07:04 289
2942782 유머 마 뽀뽀는 하지마 3 07:02 856
2942781 이슈 모든 음식에 칼로리 표시가 되어 있다면...? 8 07:00 1,344
2942780 유머 [흑백요리사] 이 아저씨 어르신 칼 뽀려쓰는 거 경력직이야 왜 ㅋ 12 05:35 5,025
2942779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만 운영하는 우유 디저트 카페 입니다~ 6 05:33 431
2942778 유머 🐱안녕하세요 출장 요리사 고등어 입니다~ 7 05:31 409
2942777 유머 🐱어서오세요 오전에만 운영하는 치즈냥 식당 입니다~ 4 05:26 339
2942776 이슈 가끔 샤워하다 치매가 의심 될때 214 05:15 23,405
2942775 이슈 D-1❤️‍🔥 3년만에 연말콘서트하는 헤이즈 1 05:13 422
2942774 유머 새벽에 보면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 괴담 및 소름썰 모음100편 7 04:44 368
2942773 유머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리는 9가지 방법🎄 19 04:43 1,749
2942772 이슈 스파이더맨인가 아파트 벽을 저렇게 탄다고??? 7 04:41 2,222
2942771 이슈 같은날 훈련소 입소했는데 너무다름 14 04:35 5,448
2942770 이슈 사실 개성주악이 아닌데 한국에서만 개성주악으로 불리는 것.jonmat 28 04:14 7,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