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또다른 내가 또다른 너를 만난다
5,246 10
2025.01.07 00:57
5,246 10

VbTcck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년)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 함께 최고의 일본 성장영화로 손꼽을만합니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한 이 작품은 열네살 소년들의 어두운 성장기를 무척이나 서정적이면서 공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 유이치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호시노가 어느날인가부터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그의 패거리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돈을 뺏기기 일쑤고 심지어 벌거벗겨진 채 자위행위를 강요당하기까지 합니다.


유이치가 유일하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곳은 인기 가수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입니다. '필리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던 유이치는 웹 상에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던 '푸른 고양이'와 릴리의 콘서트장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콘서트장 앞에서 푸른 고양이를 찾던 유이치는 깜짝 놀랍니다. 그는 바로 호시노였으니까요.

현실에선 지독한 가해자와 처참한 피해자였던 두 사람이 인터넷 공간에선 마음을 나누는 영혼의 동반자란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은 팬 사이트에 들어갈 때만 그저 착한 척 고통받는 척 외로운 척 연기했을 뿐일까요. 현실의 공간만이 진짜 세계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가상 공간에서 푸른 고양이와 필리아가 나눈 우정은 허망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진창 같은 실제 삶에서 벗어나 안식을 얻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여기서 날 데려가 줘요"라고 아프게 외치는 필리아에게 푸른 고양이가 "나는 알 수 있어요. 왜냐면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니까요"라고 공감을 통해 위로를 건넬 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그 교류는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그 어떤 대화보다도 진실합니다. 실제 삶에서 광포하다고 해서 웹에서 착하고 진실한 호시노가 위선적인 것은 아니지요. 호시노 역시 어두운 성장의 터널을 기어서 고통스럽게 지나가는 가여운 아이일 뿐이니까요.

유이치와 호시노의 실제 관계도, 필리아와 푸른 고양이의 인터넷상의 관계도, 모두가 리얼한 관계입니다, 단지 세계가 하나가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뜩 일그러진 '이곳'이 아니라 취향과 공감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어할 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공간이란 오로지 그 안을 채우는 것을 통해 의미를 가질 뿐이지요. 어떤 이들에겐 열어젖힌 마음의 내용물을 쏟아부은 사이버 스페이스가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욱 현실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부대끼느라 실망하고 지치기 쉬운 현실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가볍게 마음 하나만을 밀어넣어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계가 때때로 더욱 절실할 수도 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난 여기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릴리 팬 사이트의 글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이곳'에 무거운 몸을 담은 채 '저곳'에 마음을 부려놓은 사람의 상황은 언뜻 분열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자아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세상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는지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12/2006101260650.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0)
댓글 1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컬러그램X더쿠] 좋은 컬러그램 위대한 쉐딩♥ 최초공개 컬러그램 NEW 입체창조이지쉐딩! 체험단 이벤트 289 04.18 15,008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729,504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6,454,393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609,768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836,37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6 21.08.23 6,704,948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3 20.09.29 5,627,891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94 20.05.17 6,368,507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8 20.04.30 6,670,078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1,703,021
모든 공지 확인하기()
32446 팁/유용/추천 노래 좋은 미국 인디밴드 추천 1 04.18 560
32445 팁/유용/추천 엄마를 죽인 아빠를 죽이자 타임리프 시작되는 소름돋는 KBS 단편 드라마.jpg 46 04.18 4,989
32444 팁/유용/추천 초간단 샐러드빵 만드는 방법 17 04.18 2,710
32443 팁/유용/추천 [playlist] 레드벨벳의 사랑 코드 04.18 275
32442 팁/유용/추천 레몬 옐로우 VS 버터 옐로우 366 04.18 36,920
32441 팁/유용/추천 여성용 트렁크도 삼천원에 말아주는 다이소 23 04.18 5,752
32440 팁/유용/추천 배우 김지원과 드라마에서 보고싶은 남배우 조합은?.jpgif 35 04.18 1,103
32439 팁/유용/추천 모두에게 추천하는 글 '너는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스압) 47 04.18 2,566
32438 팁/유용/추천 인생에서 값진 첫경험.gif 13 04.18 3,429
32437 팁/유용/추천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 32 04.18 3,406
32436 팁/유용/추천 다소 독특한(?) 콘텐츠만 갖고 있는 OTT 채널인 유플레이 17 04.18 2,052
32435 팁/유용/추천 수지와 드라마에서 만났으면 하는 남배우 조합은???.jpgif 64 04.18 1,387
32434 팁/유용/추천 배우 박보영과 드라마에서 보고싶은 남배우 조합은?.jpgif 72 04.18 1,518
32433 팁/유용/추천 배우 이민기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작품은???? 68 04.18 1,321
32432 팁/유용/추천 간단하고 맛있다는 해피투게더 다솜면 2 04.18 1,589
32431 팁/유용/추천 다들 광양 매화축제 가시거든 꼬옥... 매실아이스크림을 사 드세요... 16 04.18 3,413
32430 팁/유용/추천 ‘바고케’ 라고 들어보셨습니까. 4 04.18 1,110
32429 팁/유용/추천 메가커피 아사이볼 온고잉 소식 47 04.18 6,028
32428 팁/유용/추천 우리집고양이 새벽 5시만 되면 밥달라고 내 뺨에다가 주먹질함 안줄 수가 없음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때부턴 발톱을 세워서 주먹질하기 때문에 50 04.18 5,010
32427 팁/유용/추천 토스 오픈런치킨 36 04.18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