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또다른 내가 또다른 너를 만난다
2,124 10
2025.01.07 00:57
2,124 10

VbTcck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년)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 함께 최고의 일본 성장영화로 손꼽을만합니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슈운지가 연출한 이 작품은 열네살 소년들의 어두운 성장기를 무척이나 서정적이면서 공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 유이치는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절친한 친구였던 호시노가 어느날인가부터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그의 패거리들에게 두들겨 맞거나 돈을 뺏기기 일쑤고 심지어 벌거벗겨진 채 자위행위를 강요당하기까지 합니다.


유이치가 유일하게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곳은 인기 가수 릴리 슈슈의 팬 사이트입니다. '필리아'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던 유이치는 웹 상에서 마음을 터놓고 교류하던 '푸른 고양이'와 릴리의 콘서트장에서 만나기로 합니다. 콘서트장 앞에서 푸른 고양이를 찾던 유이치는 깜짝 놀랍니다. 그는 바로 호시노였으니까요.

현실에선 지독한 가해자와 처참한 피해자였던 두 사람이 인터넷 공간에선 마음을 나누는 영혼의 동반자란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둘은 팬 사이트에 들어갈 때만 그저 착한 척 고통받는 척 외로운 척 연기했을 뿐일까요. 현실의 공간만이 진짜 세계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가상 공간에서 푸른 고양이와 필리아가 나눈 우정은 허망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곳에서의 대화를 통해 진창 같은 실제 삶에서 벗어나 안식을 얻은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여기서 날 데려가 줘요"라고 아프게 외치는 필리아에게 푸른 고양이가 "나는 알 수 있어요. 왜냐면 나도 당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니까요"라고 공감을 통해 위로를 건넬 때, 사이버 스페이스에서의 그 교류는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그 어떤 대화보다도 진실합니다. 실제 삶에서 광포하다고 해서 웹에서 착하고 진실한 호시노가 위선적인 것은 아니지요. 호시노 역시 어두운 성장의 터널을 기어서 고통스럽게 지나가는 가여운 아이일 뿐이니까요.

유이치와 호시노의 실제 관계도, 필리아와 푸른 고양이의 인터넷상의 관계도, 모두가 리얼한 관계입니다, 단지 세계가 하나가 아닐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잔뜩 일그러진 '이곳'이 아니라 취향과 공감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어할 뿐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공간이란 오로지 그 안을 채우는 것을 통해 의미를 가질 뿐이지요. 어떤 이들에겐 열어젖힌 마음의 내용물을 쏟아부은 사이버 스페이스가 실제 삶의 공간보다 더욱 현실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부대끼느라 실망하고 지치기 쉬운 현실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가볍게 마음 하나만을 밀어넣어 소통할 수 있는 사이버 스페이스의 관계가 때때로 더욱 절실할 수도 있습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난 여기 있어. 그렇게 외치고 싶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릴리 팬 사이트의 글을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이곳'에 무거운 몸을 담은 채 '저곳'에 마음을 부려놓은 사람의 상황은 언뜻 분열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자아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론 세상이 하나가 아니란 사실이 어찌나 다행으로 느껴지는지요.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12/2006101260650.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0)
댓글 10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아우어와이🌳] OURWHY와 함께하는 산뜻촉촉 바디 테라피! <모링가 모이스처 바디로션> 체험 이벤트 359 01.27 33,122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672,435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5,043,518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8,565,250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핫게 중계 공지 주의] 20.04.29 27,208,94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2 21.08.23 5,962,153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0 20.09.29 4,919,136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73 20.05.17 5,525,469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0 20.04.30 5,973,453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0,831,073
모든 공지 확인하기()
31821 팁/유용/추천 이부분 좋다. "2030 여성들이 단순히 k-pop을 즐기기위해 나오는게 아닌 가장 많은 혐오와 차별을 받았기때문에 분출하기 위해 나왔다." 2 16:01 1,001
31820 팁/유용/추천 살아있는 깃발들의 행진 7 16:00 820
31819 팁/유용/추천 드라마에서 보고싶은 동갑인 남배우-여배우 조합.jpgif 289 05:09 36,569
31818 팁/유용/추천 드라마에서 좋아했던 인생여주 캐릭터들..jpgif 👩 45 02:30 4,386
31817 팁/유용/추천 조회수1000만 10분 낮잠으로 풀충전 하는 법+특수부대원들 빨리 자는 법 3 01:19 3,782
31816 팁/유용/추천 알아두면 좋은 경조사별 인사말 1179 01:18 33,752
31815 팁/유용/추천 올해 좋아한 드라마속 어른남주 셋..jpgif 👨👨👨 155 01.28 17,560
31814 팁/유용/추천 1년동안 갔던 서울 카페 리스트 (2024) 158 01.28 7,890
31813 팁/유용/추천 메타몽의 겨울 13 01.28 2,941
31812 팁/유용/추천 눈이 즐거웠던 존잘 옆 존잘이었던 드라마..jpgif 51 01.28 7,554
31811 팁/유용/추천 제 영업 기밀인데요 애교살 톤그로론이라고 8 01.28 4,474
31810 팁/유용/추천 요즘 브로맨스 케미 미쳤다는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강혁-재원.twt 27 01.28 4,632
31809 팁/유용/추천 한국과 일본에서는 안 유명하지만 해외에서는 역전재판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하고 잘 됐다는 게임...jpg (설날 연휴 동안 심심한 덬들에게 완전 추천) 17 01.28 4,521
31808 팁/유용/추천 EXID - 아슬해 (2015) 2 01.28 794
31807 팁/유용/추천 릴러말즈 - 거리에서 (Feat. ASH ISLAND) 1 01.28 1,273
31806 팁/유용/추천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에서 끝나고 제일 기억에 남는 캐릭.twt 26 01.28 8,641
31805 팁/유용/추천 각종 문제의 원인인 윈도우 빠른 시작 끄는 방법 809 01.28 52,474
31804 팁/유용/추천 🦊취향 원덬이의 심장을 뛰게 하는 티빙 드라마 스터디그룹 배우들.gif 14 01.27 2,520
31803 팁/유용/추천 고양이가 무한히 야옹거리는 패션쇼 7 01.27 3,321
31802 팁/유용/추천 라이브로 휘슬 조져버리는 용서 못해 레전드 무대 ㄷㄷㄷ (아내의 유혹ost) 1 01.27 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