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을 위하여
3,894 11
2025.01.05 00:25
3,894 11

zdeusb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이를 계기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고향에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 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한 채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9/22/2005092270375.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3)
댓글 11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케이트💘] 🎂크리미몬스터 3종 & 립몬스터 히트헤이즈 체험단 모집 이벤트(50인) 420 04.21 34,618
공지 [완료] 오전 3시~5시 30분 이미지 서버 작업 진행 02:03 9,356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1,782,456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6,553,585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9,673,400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 금지관련 공지 상단 내용 확인] 20.04.29 28,939,532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66 21.08.23 6,745,660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44 20.09.29 5,663,862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494 20.05.17 6,425,078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3998 20.04.30 6,715,821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1,778,431
모든 공지 확인하기()
32507 팁/유용/추천 당신이 아마도 본 적이 없는 유명작가들의 그림들 23 10:55 2,754
32506 팁/유용/추천 통신사 skt 쓰시는 분들 당장 티월드 들어가서 유심 보호 서비스 가입하셔야 됩니다... 233 10:14 22,412
32505 팁/유용/추천 후방주의 안 해도 되는 BL 만화들...jpg 22 09:11 3,178
32504 팁/유용/추천 🎧 고민은 많고 잠도 안 오고... ( ᵕ‧̯ᵕ̥̥ ) 인생 힘들다 🌃 ˗ˋˏ 새벽감성록 4곡 추천 ˎˊ˗ 2 00:45 1,096
32503 팁/유용/추천 갤럭시 S23 등 오늘 업뎃된 One ui 7.0 에서 소소하게 바뀐 부분 34 00:43 4,081
32502 팁/유용/추천 배우 고윤정의 인생케미는??.jpgif 161 04.22 7,300
32501 팁/유용/추천 창작하는 사람들이 꼭!!! 꼭!!! 꼭!!! 읽었으면 좋겠는 만화책들...jpg 354 04.22 30,534
32500 팁/유용/추천 좋아했던 사극 드라마 커플 하면???.jpgif 37 04.22 1,627
32499 팁/유용/추천 9천만 달러(1200억원 넘음) 이상 벌었다는 오피셜 떠서 게이머들 ㄴㅇㄱ된 인디 게임...jpg 18 04.22 3,856
32498 팁/유용/추천 ‘문재인입니다’를 보는 내내, 테러에 가까운 소음 공해 속에서 한껏 늙어버린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을 마주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542 04.22 52,743
32497 팁/유용/추천 후쿠오카 미쉐린 2스타 식당 다녀온 후 미쉐린에 관해 얘기하는 최강록 04.22 1,599
32496 팁/유용/추천 아직까지도 남자주인공의 찐사하면 갈린다는 드라마.. 덬들의 생각은??.jpg 17 04.22 2,298
32495 팁/유용/추천 대체 제목을 뭐라고 써야 사람들이 많이 봐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음...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 씁니다... 제가 좋아하는 걸그룹 노래 한 번만 듣고 가세요... 노래 진짜 좋습니다... 나 이 노래 계기만 있으면 한국에서도 인기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계기가 안 생긴다 얘들아... 그냥 한 명이라도 더 알고 가... 노래 안 좋으면 더쿠 포인트 환불해드릴게(못 합니다) 7 04.22 1,245
32494 팁/유용/추천 원덬이가 써보고 추천하는 비오는날 스탠딩 꿀템 3 04.22 1,751
32493 팁/유용/추천 🎧 날씨가 구릴 땐 ʚ̴̶̷ ̯ʚ̴̶̷ 노래라도 상큼한 걸 들어줘야함 🍃 ˗ˋˏ 청량록 4곡 추천 ˎˊ˗ 3 04.22 635
32492 팁/유용/추천 외국에서 관상용으로 인기 있는 꽃이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이유 : 맛있어서 13 04.22 3,687
32491 팁/유용/추천 두바이 향수 자판기! 초고가 향수를 커피한잔 가격에 한번 뿌려줌! 9 04.22 2,319
32490 팁/유용/추천 바티칸 성상이 갓과 도포를 쓴 이유 15 04.22 3,517
32489 팁/유용/추천 [it`s magic] 마스터클래스(Master Class) With 손종원 04.22 546
32488 팁/유용/추천 덬들의 더쿠 비밀번호를 다시 확인해야하는 이유...jpg 49 04.22 5,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