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을 위하여
6,905 11
2025.01.05 00:25
6,905 11

zdeusb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이를 계기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고향에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 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한 채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9/22/2005092270375.html?outputType=amp



목록 스크랩 (3)
댓글 11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더쿠X여우별💙 불편한 그날, 편안함을 입다 - 여우별 액티브 입오버 체험단 모집 177 05.18 18,082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188,113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2,445,938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151,034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750,793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119,718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5 21.08.23 8,573,765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1 20.09.29 7,484,443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23 20.05.17 8,692,641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1 20.04.30 8,584,502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540,714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71947 유머 [KBO] 자팀도 해설도 눈을 의심하는 수비 14:16 20
3071946 이슈 멋진신세계 근데 이주의 최고 야르한장면은 3화 에필 같음 무명배우 여주한테 소속사 차려주는 남주 < 그냥 한드에선 이정도는 해줘야 재벌이지ㅇㅇ 싶은데 2 14:15 225
3071945 기사/뉴스 GTX-A 삼성역 '철근 누락' 파문…개통 지연 우려 커져 1 14:14 72
3071944 이슈 <21세기 대군부인>에서 "종묘" 촬영허가 신청 후 촬영한 장면 28 14:12 1,657
3071943 이슈 케이팝의 악마, 케이팝의 지배자, 케이팝의 권위자, 케이팝의 황제, 케이팝의 제왕, 케이팝의 군림자, 케이팝의 마스터, 케이팝의 신, 케이팝의 대마왕, 케이팝의 대명사, 케이팝의 정석, 케이팝의 전설, 케이팝의 표본, 케이팝의 종결자 그 자체인 노래... (뭐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싶을 수 있는데 다들 보면 인정할 것) 19 14:11 1,153
3071942 이슈 <멋진 신세계> 3-4화 메이킹 (촬영장 분위기 캐좋닫ㄷ) 2 14:10 387
3071941 기사/뉴스 미미, 연애 경험 無→대리로 채우는 중…"이제 연애하면 무조건 결혼" ('아근진') 5 14:10 727
3071940 이슈 트위터 난리난 고백 멘트.twt 4 14:10 925
3071939 이슈 블랙핑크 지수 소속사 공계에 올라온 2026 디올 크루즈 쇼 참석 사진 7 14:08 838
3071938 이슈 이젠 룰이고 뭐고 없는 냉부 근황 8 14:08 627
3071937 유머 한국인들 킹받게 하는 발음 테스트.twt 5 14:07 470
3071936 이슈 완주군 <21세기 대군부인> 스토리 투어 취소됨 54 14:07 2,415
3071935 이슈 [공지] 르세라핌 김채원 건강 상태 및 스케줄 안내 177 14:03 10,928
3071934 유머 장원영: 언니 누가 꽃이게~ 15 14:03 1,276
3071933 이슈 서울대 의대 박사가 30년 넘게 비타민 C만 외쳐서 미친 사람 취급받았는데 알고 보니 진짜 전설이었음 53 14:02 3,566
3071932 이슈 응급구조사 대상으로 한 로또! 5월 26일 운영 2 14:02 706
3071931 기사/뉴스 안동에서 다시 만난 한일 정상 5 13:59 1,146
3071930 정치 오세훈 "GTX 철근 누락 뉴스 보고 알아… 정원오가 대시민 사과해야" [뉴시스Pic] 106 13:58 1,785
3071929 이슈 차라리 이 논란이 선녀였던 대군부인 35 13:57 3,526
3071928 이슈 [예고] 🚨속보 🚨인터뷰하는 전정국 실존! 방탄소년단 정국의 알아두면 쓸데있는 잡학사전 💜 | 하퍼스바자 5 13:57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