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qoo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을 위하여

무명의 더쿠 | 01-05 | 조회 수 6898

zdeusb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대학생 츠네오가 다리를 쓰지 못해 집에만 틀어박힌 조제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판자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을 나누다가 서로 다른 처지 때문에 헤어지게 된 츠네오는 조제의 할머니가 죽자 이를 계기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 함께 삽니다.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에게 소개시키기 위해 조제와 자동차를 타고 떠난 츠네오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갈 수 없게 됐다고 고향에 전화를 합니다. 전화를 받던 동생은 “형, 지쳤어?”라고 되묻지요.

그 여행 후 결국 츠네오는 조제와 헤어집니다. 영화 속 이별의 순간은 의외로 너무나 깔끔합니다. 조제는 담담히 떠나 보내고, 츠네오는 별다른 위로의 말 없이 그냥 일상적인 출근이라도 하는 듯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섭니다.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여자친구는 그를 만나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합니다. 묵묵히 들으며 함께 걷던 츠네오는 갑자기 무릎을 꺾고 길가의 가드 레일을 잡은 채 통곡합니다. 그 순간 츠네오의 독백이 낮게 깔립니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가지 댈 수 있지만, 사실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결국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우리가 도망쳐 떠나온 모든 것에 바치는 영화입니다. 한 때는 삶을 바쳐 지켜내리라 결심했지만, 결국은 허겁지겁 달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담겨 있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처참한 결말을 논외로 한 채 사랑 자체의 강렬함만으로 따지면, 오라뮨데 백작 부인 만큼 온 몸을 던지는 사람도 없겠지요.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조제만큼 절박하게 사랑이 필요한 경우도 드물 거고요. 공포 때문일 수도 있고 권태나 이기심 탓일 수도 있겠지요. 동생이 되물었듯, 츠네오는 그저 지쳤던 것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떠나갑니다.

모든 이별의 이유는 사실 핑계일 확률이 높습니다. 하긴, 사랑 자체가 홀로 버텨내야 할 생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게 어디 사랑에만 해당되는 문제일까요. 도망쳐야 했던 것은 어느 시절 웅대한 포부로 품었던 이상일 수도 있고, 세월이 부과하는 책임일 수도 있으며, 격렬하게 타올랐던 감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결국 번번이 도주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벗어냅니다. 그리고 항해는 오래오래 계속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가 도망쳐 온 모든 것들에 축복이 있기를.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부박함도 시간이 용서하길. 이 아름다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깨끗하게 묶은 조제의 뒷모습처럼, 결국엔 우리가 두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삶의 뒷모습도 많이 누추하진 않기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9/22/2005092270375.html?outputType=amp



[주의] 이 글을 신고합니다.

  • 댓글 11
목록
3
카카오톡 공유 보내기 버튼 URL 복사 버튼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 칸 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이후 국내 단 한번의 시사! <군체> IMAX 시사회 초대 이벤트 462
  • [공지] 언금 공지 해제
  •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5
  •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0
  •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19
  •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0
  •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 모든 공지 확인하기()
    • 엄마 불륜현장 목격했는데 순영이 아프다고 병원까지만 태워달라는 강태주
    • 03:30
    • 조회 280
    • 이슈
    • 역시 뭐든 할거면 제대로해야됨 왼쪽표정봐라 밝아보이고 얼마나 좋냐
    • 03:29
    • 조회 194
    • 이슈
    • 시대별 TV의 진화사
    • 02:58
    • 조회 472
    • 이슈
    2
    • 핫게 간 아이오아이 티저 본 아이오아이 반응
    • 02:45
    • 조회 2104
    • 이슈
    19
    • 무슨 자연주의 빵집에 갔더니 제법 맛있어보이는 쿠키를 파는거야? 그래서
    • 02:37
    • 조회 2086
    • 이슈
    4
    • 리더이자 ㄹㅇ 극T인게 느껴지는 엔믹스 해원 다큐 발언들.....txt
    • 02:25
    • 조회 1128
    • 이슈
    3
    • 태국의 고양이들은 신기했던게 내가 조금 다가가면 먼저 다가옴...
    • 02:21
    • 조회 2464
    • 이슈
    28
    • 아나바다 실천 중인 08년생 여자아이돌.jpg
    • 02:03
    • 조회 1470
    • 이슈
    10
    • 아이의 열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0년 동안 모아온 축하 영상
    • 02:00
    • 조회 770
    • 이슈
    1
    • 장인어른의 눈물.txt
    • 01:58
    • 조회 7930
    • 이슈
    117
    • 21년 전 오늘 발매된_ "같은 생각"
    • 01:55
    • 조회 294
    • 이슈
    3
    • BL 처음 보면 겪는 과정.jpg
    • 01:48
    • 조회 3916
    • 이슈
    40
    • 갑분옆....×
    • 01:44
    • 조회 445
    • 이슈
    • 정성 미친 아이돌 역조공 클라스(직접만든 쫀득쿠키 220인분, 레몬쿠키 400인분, 딸기무스붕어빵)
    • 01:42
    • 조회 2523
    • 이슈
    12
    • 방금 처음으로 공개된 베이비몬스터 ‘춤’ 퍼포먼스 풀버전.......
    • 01:35
    • 조회 705
    • 이슈
    5
    • 남우현(NAM WOO HYUN) '소년소녀 (Feat. 인피니트)' Audio Preview
    • 01:30
    • 조회 268
    • 이슈
    3
    • 배우 임은경 리즈시절
    • 01:22
    • 조회 2691
    • 이슈
    10
    • 기리고 형욱이 과거
    • 01:22
    • 조회 1430
    • 이슈
    4
    • [국중박X춘식이 콜라보] 이촌역부터 찍혀있다는 춘식이 발자국
    • 01:19
    • 조회 1681
    • 이슈
    2
    • 블랙핑크 리사 멧 갈라 비하인드 Inside LISA’s Sculptural Met Gala Look | Vogue
    • 01:17
    • 조회 435
    • 이슈
    1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