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상머리에서 “아~ 현생 좆같다~”를 외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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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짧고 함축적으로 해야 하니 말입니다. 심지어 상대가 즉각적으로 못 알아먹는 것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오래오래 생각해서 기어이 해석을 해내는 것도, 그리고는 너 어제 왜 그렇게 말했냐고 따져 묻는 완벽한 오역에, ‘네? 넹. 넴. 넵.’ 등을 적절히 섞어 만들어내는 나의 운율 섞인 대처까지. 과연 현실은 시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까만 속과는 달리 끝끝내 미소를 유지하는 얼굴은 이 비극의 방점, ‘시적 허용’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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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이 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나도 시 같은 현실을 제쳐두고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문학동네에 전화를 걸까. “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라고 함축적으로 말할까. 대형 출판사는 마음도 대형이지 않을까. 아닌가. 복수가 대형인가.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당신 왜 그렇게 말해?”라는 답이 돌아올 것이 두려워 마음을 고이 접고 서점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날도 시 한 편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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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굉장한 자질이 있어요. 엄마,
나는 내 생애 최고의 시를 쓰고 있어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자살한 시인의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 죽었을까요
그녀의 일기장은 칠백 페이지 넘게 두꺼워요
저는 요즘 일기를 쓰지 않아요
당신이 남긴 편지에 답장도 못 했죠
쩔쩔매며 시에 매달리지만 시를 못 쓴 채 행사는 해요
어제 두 시인과의 낭독회가 끝날 무렵
객석에서 독자가 제게 질문했어요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대표작은 뭔가요?”
조금 머뭇거리다 저는 답변했답니다
“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쓸 예정이에요.”
대개 작가들이 하는 농담이죠
정밀하게 시간이 흘러도 내일은 지연되죠
누가 뭘 가지고 도착하든
지구가 태양과 멀어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여전히 저는 아무하고도 같이 살 수 없지만
어머니, 저는 시가 제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김선형 옮김, 문예출판사, 2004, 654쪽.
_김이듬, 「내일 쓸 시」(『투명한 것과 없는 것』)
저는 종종 자질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배우에게 필요한 덕목이 오직 연기만은 아닌 것 같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에 합당한 삶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왜 나는 적격하지 않은가에 대해 자책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갖기에 난 너무 너절하고 부도덕하다고. 배우라는 직업은 순전히 환상이고 현실은 허수아비라고. 배우라는 직업.
그 배우라는 ‘직업’의 현실 앞에서 삶의 자질이 부족한 저는 무릎을 꿇는 날이 많습니다. 흔히 영화로서, 역할로서, 좌우지간 보여지는 것으로서 대표되는 직업인지라 그 절망의 쳇바퀴를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늘의 이 시가 생각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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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대표작에 대해서 물을 때, “<파수꾼>?” 혹은 “<동주>?” 혹은 “아마도 지금 찍는 작품? (웃음)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대박!” 따위의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문득 ‘나를 대표하는 것이, 남이 쓴 대사와 지문을 수행하는 내가 되어도 되는지’에 생각이 이릅니다. 나의 직업이 나를 정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의 성과와 삶의 성과가, 직업의 자격과 삶의 자격이 동일한 것도 아니고요. 개연성이 없어도, 앵글이 후져도, 지루하고 박자가 엉망이어도 모든 삶엔 각자의 제자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요. 아무리 내가 살아가는 자질이 없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 대표작은 ‘내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내 직업이 내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시인의 그 문장이 오늘은 조금 덜 절망하게 만듭니다. 참 감사한 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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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니 이렇게 시로 위안을 얻을 때도 생기는군요. 이 편지가 완벽한 오역일 수 있겠지만, 별수 있나요. 내 돈 주고 사서 내 마음대로 해석하겠다는데요. 여러분들도 억지로 읽으시고 마음껏 오역하시고 멋대로 행복하시길. 설날에 큰아버지께 시 한 수 얼큰하게 읊어드리고 세뱃돈 더블로 받으시길 바라보겠습니다. 떡국 많이 드시구요. 그럼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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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를 사랑해, 136회
소개된 시집 - 김이듬: 투명한 것과 없는것
편지를 쓴 사람 - 박정민
나에게 있어서만큼 나의 대표작은 오롯한 나의 삶이라는, 힘들때마다 읽는 글인데 문득 공유하고 싶어져서 올려봐
출처:)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KsElSvCNe8TkkydXxJbWyqAO4zAwI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