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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김도헌의 음감] 에스파의 '위플래시', 속도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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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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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entertain.naver.com/article/433/0000110263

 

 

새하얀 뮤직비디오 촬영 세트장의 한가운데 결집한 에스파 멤버들 사이에서 액체 금속의 로고가 떠오른다. 초능력자들의 '슈퍼노바(Supernova)'와 미신과 공포가 지배했던 '아마겟돈(Armageddon)', 거대 로봇이 되어버린 '핫 메스(Hot Mess)'를 거쳐 도착한 '위플래시(Whiplash)'의 세계는 속도의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기계 문명이다.

 

밴드 실리카겔과의 작업으로 특유의 금속 미학을 확립한 멜트미러 감독의 손에서 다듬어진 에스파는 20세기의 미래파들이 경배해 마지않았을 차갑고 정격적인 휴머노이드 여신들이다. 멤버들은 수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 삼각대, 레일을 타고 수평으로 움직이는 달리 숏, 적 백 흑으로 깜빡거리는 섬광의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 멈춤 없이 시선을 바꾸는 키노 아이의 잘게 쪼개진 컷에서 무표정한 멤버들은 기하학적인 움직임과 자유로운 인간의 행동을 오간다. 오히려 그로 인해 에스파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 의해 작동하는 인조인간처럼 보인다. 대담하고, 도도하고, 공격적으로 프로그래밍한 신인류의 알고리즘은 더 빠르게, 더 집요하게, 더 화려하게 향한다. 카리나가 '포탄 위에라도 올라탄 듯 으르렁거리는' 자동차의 액셀을 세게 밟을 때, 저편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지는 황홀한 미래가 눈앞에 휘몰아친다.

 

에스파의 기획 중심에 미지의 존재가 있다. SM 컬처 유니버스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데뷔 시기부터 그들은 현실 너머 가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와 마주하며 그들을 위협하는 적과 싸우고, 인격의 연결을 통해 처음 경험하는 낯선 세계를 마주했다. 세계관의 서사와 강한 등장인물의 개성의 힘이 줄어들자, 이 개념에서 피어난 감정은 두려움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낙관적 미래로부터 출발한 두근거리고 환상적인 디지털 세상의 모험이 시들해지고, 일말의 불안이 감지했던 비극이 현실에 펼쳐지고 있다. 에스파는 스스로 생경한 존재가 되었다. 한탄하고 분노했던 세기말 SMP 음악의 정서를 주축으로 오늘날에 강림한 그들은 경험의 축적을 허용하지 않는 파편적 디지털과 급속한 기술 발전 아래의 부작용, 망가져 버린 질서의 카오스와 종말의 전쟁터를 살아가는 현대의 정서를 관통하고 있다. '슈퍼노바'와 '아마겟돈'이 2024년 케이팝 최고의 곡을 놓고 다툴 수 있는 이유다.
 
'위플래시'는 둘보다 한결 여유가 있다. 차갑고 정적인 테크노 장르를 선택했다. 반복되는 마디와 2절이 등장하기 전까지 극도로 절제된 선율, 전주와 후주 등 곡의 기승전결을 무시하는 구조 등 테크노의 공식에 충실한 노래다. 개성 넘치는 멤버들의 가창마저 납작하게 눌러놓은 데서 보컬 디렉션의 고집을 확인한다.
 
'슈퍼노바'와 '아마겟돈'이 시종 불길하고 어두웠다면 '위플래시'의 채찍질은 규칙적인 부품 조립의 안정적인 소음처럼 들린다. 에스파의 음악을 묘사하는데 자주 사용되는 '쇠 맛'이 느껴지는 노래지만, 가장 차분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양면적인 곡이다. 캄캄한 어둠과 짙은 안개가 자욱한 테크노 클럽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듯한 음악에 몸과 정신을 놓아버리고 춤을 추는 주변 이들에게 무한한 동지애와 인간미를 느끼는 경험처럼 말이다.
 
그래서 '쇠 맛'보다 '전자 맛'이라는 카리나의 대답이 정확하다. 뮤직비디오 중간 명멸하는 '내가 나쁘다는 걸 알았던 첫날(Day 1 Know I Been Bad)', '네가 이해하지 못할 여러 이유(They're Reasons You'll Never Understand)'와 같은 문구는 이 서사를 거듭 증명한다. 찰리 XCX가 주도하는 2024년의 트렌드 '브랫(brat)'과 파티 걸, 클럽 문화의 요소로부터 영감을 받은 케이팝 트랙 중 주목할 만한 곡이다. 특히 뮤직비디오로 완성된 금속 재질과 기계 신화는 찰리가 2010년대 중후반부터 집중했던 하이퍼 팝의 실험과도 맞닿아 있으며, 현재 가장 급진적인 미래파 음악가 그라임스가 SM 산하 댄스 레이블 아이스크림(iScreaM)에서 이들의 광팬을 자처하며 리믹스를 발표한 당위가 되어준다.
 
에스파의 질주에 유일한 흠이 있다면 싱글의 파괴력과 그들이 가꾼 사상을 앨범 단위 결과물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정규 앨범 '아마겟돈'을 살펴보면, 두 타이틀곡에 비해 비슷한 기조의 '셋 더 톤(Set The Tone)'과 '마인(Mine)'은 조연 역할 그 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이후 수록곡은 케이팝 그룹의 정규작이 피해 갈 수 없는 정돈되지 않은 톤의 백화점식 구성 한계에 머물렀다. 가장 작품 단위로 통일되어 있으면서 다채로운 매력을 뽐냈던 '새비지(Savage)'의 최고점을 경험한 데서 느껴지는 단점이다.
 
'위플래시'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날카로운 사운드 샘플과 멤버들의 랩이 두드러지는 '킬 잇(Kill It)'은 에스파의 전작에도, 향후 등장할 앨범 어디에도, 심지어는 NCT의 앨범에 들어가도 어울릴 곡으로 개성이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위플래시'는 메시지와 핵심 이미지를 타이틀곡에 몰아 넣은 대신 여러 가능성의 곡을 에스파에 맞게 최적화하여 향후 유연한 움직임을 상상해 보게끔 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S.E.S.의 '비 내추럴(Be Natural)'과 레드벨벳의 '오토매틱(Automatic)'으로 이어지는 SM 걸그룹 R&B 계보를 잇는 '플라이츠, 낫 필링스(Flights, Not Feelings)'와 '플라워스(Flowers)', 틱톡발 록 싱어송라이터들의 곡을 연상케 하는 카시 오페이아(Cazzi Opeia)의 '저스트 어나더 걸(Just Another Girl)' 모두 자연스럽다. 먼저 공개된 솔로곡과 더불어 멤버에 어울리는 스타일과 곡을 찾는 실험이 진행 중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음원 스트리밍 차트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카리나의 래칫 장르 솔로곡 '업(Up)'과 연결할 수 있는 '핑크 후디(Pink Hoodie)'가 귀에 들어온다. 스크린 속의 낯선 존재가 기계 장막을 넘어 현실로 손을 뻗치는 노력이다.
 
'위플래시'의 뮤직비디오에서 재빠르게 스쳐 가는 문장 중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Bringin' The New Era)'라는 설명이 있다. 현란한 영상의 끝에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보는 이들을 응시하는 닝닝, 윈터, 지젤, 카리나의 장면은 케이팝이라는 게임을 헤쳐 나갈 게임 캐릭터 선택창처럼 보인다. 이미 에스파는 SMCU 시절 로켓 펀쳐(Rocket Puncher), 아마멘터(Armamenter), 제노글로시(Xenoglossy), 해커(Hacker)라는 전투 능력을 부여받았고, '걸스(Girls)' 뮤직비디오와 세계관 영상에서 이를 활용하여 악역 블랙 맘바(Black Mamba)와 싸워나가는 게임의 속성을 선보인 바 있다.
 
2024년의 에스파는 완전히 다른 게임에 들어와 있다. 대서사 아래 기대되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과거와 달리 이들은 어떤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높은 능력치를 바탕으로 어떤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으며, 능동적으로 게임과 현실을 왕래하며 충격을 안길 능력도 갖추고 있다. 뮤직비디오 초반 떠오른 로고가 액체 금속으로 형성된 까닭이다. 에스파는 빠르고, 생각하고, 집중한다. 그 신속함과 다재다능함, 한편으로는 일종의 뻔뻔함이 이들을 케이팝의 정신과 가치를 대표하는 선두 주자로 앞서나가게 만든다.
 
1909년 미래주의를 제창한 이탈리아의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는 '미래파 선언'에서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움, 다시 말해 속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상이 더욱 멋있게 변했다고 확언한다.'라 주장했다. 매혹적인 선동 아래에는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의 부조리와 파멸을 몰고 올 군국주의의 재앙이 싹트고 있었다. 에스파의 기계세(機械世)는 다르다. '위플래시'는 케이팝의 속도와 새 시대의 주인공을 찬미하는 미래주의 찬가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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