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사업가의 딸로 태어났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와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이나 프란체스카나 모두 재혼이었다. 1931년 이승만이 빈 회의에 참석했을 때,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합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되었고, 결국 25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이어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가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하며 첫 번째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 외국 혈통의 대통령 부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이승만을 헌신적으로 내조했으나 고령인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우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사실 한국어를 잘 못했으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드시 영어로 말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본인이 외국 사람이고, 이승만이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으니 가정사에서 상당히 진보적일 것 같지만 목격자들에 의하면 가정사는 거의 조선시대 급이었다고 한다. 즉 이승만은 왕처럼 집안일에 매우 고압적이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직 순종한다는 것. 사실 두 사람의 성장하고 결혼할 당시의 사회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미국이나 유럽이라고 마냥 진보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유럽 모두 한국처럼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집안이 많았다. 특히 이승만은 자신에게 왕족의 피가 흐르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며 자라 제왕적, 가부장적 사고가 평생을 관통한 사람이었다.
언어차이로 의사소통이 어려웠던지 프란체스카 여사가 어떤 성격이나 성향을 가졌는지 알려주는 대목이 거의 없다. 일화로 이승만에게 명절선물로 특산물이 많이 들어왔는데 부부가 먹지도 못할 정도의 양이라 남들이 다시 선물로 남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으나 그냥 보관하다 모두 상해서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서양식 사고방식으로 내껀 내꺼 이런 마인드가 강했던지, 아니면 한국의 나누어 먹는 인심을 몰랐던지)
정장 단벌에 30년 넘게 쓴 양산, 유일하게 잘 말하는 한국어가 '쪼금쪼금'이었다는 일화을 보면 그냥 구두쇠 기질이 강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결혼할 당시 가족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고 함
(프란체스카는 빈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한 집안 딸,
이승만은 이름모를 나라에서 온 가난한 동양인)
이승만이 미국에서 자리잡은건 거의 이 여자 때문일만큼
한국 전통여성 못지않은 헌신적인 내조로 유명
동양인인 이승만이 미국 주류사회에 섞일 수 있었던건
백인이었던 아내의 인맥과 사교능력 & 재정적 지원 덕분
남편이 사무를 볼때 서류를 정리하고 타이핑하는 비서역할
+ 미국 한인사회에서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그고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역할
+ 넓은 미국땅을 이승만이 이동할때 직접 운전수 역할까지 하며
온기없는 차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벌벌떨며 남편을 기다렸다고 함
다만 동양남자들의 자리에서 기생을 끼고 첩을 동행하는 문화만큼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해서 영부인이 되자마자 모든 공식자리는 부부동반으로 바꿔버림
남편이 하와이로 쫓겨날때 같이 하와이로 따라갔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는 오스트리아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결국 다시 한국으로 돌아옴
어쨌든 초대 영부인인만큼 청와대에서 초대도 받으면서 장수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