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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도랑물을 마시고 그리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에서 읽은 문장이라고, 완전히 그 문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어감이었으며 그걸 읽은 다음부터 그걸 자주 생각한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그걸 계속 생각하다보면 내가 결국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고. 어른이 되면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내게는 이상한 기억이 있었거든. 어머니가 아기를 던져. 우리는 벽에 대고 앉아 있었는데 어머니가 품에 안은 아기를 몇 번 어르다가 그 애를 던졌어. 아기가 바닥에 깔린 담요 위로 쿵 떨어졌어. 내가 그걸 봤어. 너무 이상한 기억이라서 어릴 때 꿈이나 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몇해 전에 아버지에게 그런 기억이 있다고 말했더니 아버지가 한숨을 쉬는 거야. 니 엄마가 걔만 던졌냐. 너도 던지고 니 동생도 던지고 누구도 던지고…… 나는 그래서 내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내 아버지가 그걸 다 알면서도 우리 자매를 어머니 옆에 방치했다는 걸 알았어. 그 두 사람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그 말을 들었을 땐 기막혀 화만 났는데 요즘 그 말을 자주 생각해. 잊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황정은, 다가오는 것들
언젠가 강이에게 스노볼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이가 발로 건드릴 때마다 반짝이는 눈이 쏟아질 거였다. 더 먼 언젠가에는 강이와 함께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있는 나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임솔아, 최선의 삶
김은 감은 눈을 떴다.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나님은 아무도 벌하시지 않는다고, 우리를 벌하는 건 우리 자신일 뿐이라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아내와 잡은 손에 힘을 주었고 그럼으로써 아내가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에는 침묵하고 잘못을 추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처남의 죄를 하찮게 만들어버린 것을 모르는 척했다. 아내에 따르면 모두의 인생에 죄가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도 죄가 없었다.
-편혜영, 개의 밤
중국집에는 이상하게도 손님이 별로 없었다. 원탁 한 곳에만 두툼한 메뉴첩이 올라가 있고 젓가락과 숟가락이 각 자리에 맞게 준비되어 있었다. 예약 손님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손님들은 아직 오지 않았고 거기에는 손님들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젓가락과 숟가락만 놓여 있었다. 올 거라는 약속, 채워지리라는 표지, 추후를 예비하는 노력 같은 것.
-김금희, 크리스마스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조차도 젊은 세대가 느끼는 빈곤과 무기력은 공통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래, 요즘 세대들이 힘들지, 희망이 없지, 그래서 중국 젊은이들도 뤄라는 한자를 붙여서 가난한 졸업, 무일푼 결혼, 이렇게 자기들을 자조하고, 하며 되는대로 말을 이었는데, 그때 학생이 선생님, 아니에요! 라고 좀 큰 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와물와글 떠드는 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와서 나는 학생이 왜 그렇게 발끈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학생이 자기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힘이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정정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게 많이 다른가, 하고 물었고 학생이 “네, 저희가 힘이 없는 거지 희망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하는 순간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중에 운전을 해서 이 도시를, 꽉 막힌 강변도로를, 한 강의 대교들을, 교차로를 여러번 지나고 나서 나는 혹시 지금의 시선으로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럴 자격이 내게는 없는 것이 아닐까.
-김금희,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증오심이 성장기의 내게는 얼마간 유용했다. 덕분에 마음대로 내가 되어갈 수 있었다.
-김소연, 어금니 깨물기
돌이 됐다고 했지, 죽었다는 건 아니잖아요?
장비들의 배터리를 충전하고 여장을 정리하던 인선이 창문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푸른 연기를 삼켰다가 창밖으로 길게 뱉었다.
그때 안 죽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저건 그러니까…… 돌로 된 허물 같은 거죠.
그녀의 눈에서 장난기가 반짝였다.
아, 말하고 보니까 정말 그런 것 같은데.
농담이 아니라는 듯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인선이 갑자기 말을 놓았다.
허물을 벗어놓고, 여자는 간 거야!
아이처럼 만세 부르듯 두 손을 치켜든 인선을 향해 나도 웃으며 말을 놓았다.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한강, 소년이 온다
정말 우리가 유일하다면
왜 이토록 미워할까
원숭이 옆에 원숭이
꼬리 옆에 꼬리
지나갈 수 없는 것이 있어
나뭇가지에 걸려 있네
우리 사이엔 몇 명의 사람
강에 떨어진 나뭇가지가
그쪽으로 흘러가네
네가 주워
땅을 긁으며 걸을 때
우리는 이어지고 있다고 믿어
-손 미, 원숭이 옆에 원숭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4월 23일.
천지영이 창을 열었을 때 풍령에 달린 실이 끊어졌다, 라는 문장을 쓰고 좋아서 며칠 온화한 기분으로 살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을 잘 마무리해 마감하고 싶다.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는 단편이 될 것이다. 1년 전에 쓰겠다고 약속을 해두고 쓸 수 있을까,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쓸 수 없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 쓰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이 소설을 마무리하고 싶고 그런 장면으로 소설을 마무리할 생각에 행복하다.
사랑이 천성이라고, 내가 말한 적 있던가?
-황정은, 일기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서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야.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