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이 차에 열광했어도 차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차를 가공하는 방법은 100% 중국이 독점했다. 아편전쟁이 끝나고 굳게 닫혀 있던 중국의 빗장이 조금 열리자 영국 동인도회사는 차 만드는 기술을 훔쳐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3년 동안 식물을 채집하고 중국에 관한 책도 쓴 포춘을 고액 연봉으로 모셔가 차 씨앗과 차나무 묘목을 훔쳐오게 한 것이다.
포춘은 1848년 6월 런던을 출발해 9월에 홍콩에서 배를 갈아타고 상하이로 갔다. 중국 속으로 깊이 들어간 그는 위험한 고비도 겪었지만 결국 수많은 차나무 묘목과 씨앗을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인도까지 몇 달이나 걸려 가는 동안 씨앗과 묘목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다. 배에는 선원들이 마실 물을 실을 공간도 부족했다. 몇 달 동안 차나무 묘목에 줄 물은 더욱 없었다. 수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묘목은 안 좋은 상태로 인도에 도착했고 심어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포춘은 위즈 상자를 만들었다. 영국인 식물학자 위즈 박사가 생각해낸 이것은 말하자면 밀봉한 상자였다. 상자에 흙을 담고 식물을 심은 다음 밀봉하면 다시는 물을 주지 않아도 식물이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신기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싶다. 중요한 것은 밀봉이다. 밀봉을 하면 상자 안이 작은 생태계가 돼 식물이 살아갈 수 있다. (한 남성이 유리병에 식물을 심어놓고 밀봉한 채 뒀는데 40년이 지나도록 식물이 잘 살고 있다는 뉴스가 얼마 전에 나왔다.)
첼시왕립식물원장이던 로버트 포춘, 중국에서 차 묘목 훔쳐
포춘의 차나무는 인도 다르질링만, 인도 아삼 재래종은 인도 전역 퍼져
사실 위즈 상자로도 단번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위즈 상자를 믿지 못한 한 선원이 이대로 두면 차나무 묘목이 모두 죽겠다고 생각해 상자 뚜껑을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물도 줬다. 차나무는 모두 말라 죽었고 씨앗은 곰팡이가 펴 쓸 수가 없었다.
포춘은 다시 보냈다. 이번에는 상자에 흙을 채우고 차나무 씨앗을 얕게 심고 흙으로 살짝 덮었다. 물을 주고 나무판자로 단단히 봉한 다음 배에 태웠다. 4달 후 씨앗은 건강한 상태로 인도에 도착했고 무사히 싹을 틔웠다. 포춘은 8명의 제다 기술자와 차 만들 때 필요한 도구까지 전부 갖춰 상하이를 출발했다. 4일 후 홍콩에 닿았고 증기선으로 갈아탄 후 인도에 도착했다.
포춘은 1만7000개의 차 씨앗, 2만3892개의 묘목, 차 가공 전문가를 인도에 데려갔다. 중국 최대 수출 상품의 핵심 비밀을 통째로 가져간 것이다. 당시 영국 사람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포춘이 중국에서 훔쳐온 차나무 품종이고, 하나는 아삼에서 발견된 차나무 품종이었다. 둘 다 차나무인 것은 확실했지만 매우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포춘의 차나무는 잎이 작고 향기가 좋았고, 아삼의 차나무는 잎이 크고 맛과 향이 진했다. 처음에 영국 사람들은 아삼 차나무보다 포춘의 차나무를 많이 심으려고 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아삼 차나무가 훨씬 잘 자랐다. 포춘의 차나무는 아삼 차나무의 생산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포춘의 차나무는 인도 북부 해발 고도가 높은 다르질링에 심어졌고, 다른 대부분 지역에서는 아삼 차나무가 심어졌다. 포춘이 가져간 차나무는 그렇게 다르질링 홍차의 기원이 된다.
영국인은 포춘을 영리하고 용감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또한 “포춘 덕분에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차를 마실 수 있게 됐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중국인 입장에서 포춘은 그저 ‘식물 채취꾼, 도둑, 산업 스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