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로 39세 딸을 잃은 중국동포(조선족) 채성범(73)씨가 3일 화성의 한 모텔방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채씨가 딸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채씨는 "이 사진을 영정으로 올리려 한다"고 했다.
"기자님, 내가 너무 답답해서… 전화했어요. 입맛도 없고. 지금 소주 세 병 먹었는데. 잠이 안 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내일 좀 와줄 수 없어요?"
지난 2일 밤, 수화기 너머의 채성범(73)씨는 중국말과 한국말을 오가며 횡설수설했다. 채씨는 지난달 24일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로 39세 딸을 잃은 아버지다. 채씨와 그의 딸은 중국 동포(조선족)다.
다음날인 3일, 채씨가 머물고 있는 모텔로 향했다. 합동분향소가 차려진 화성시청에서 500미터 거리의 'OOOOO호텔'. 화성시청에서 유가족들의 거처로 마련한 곳이었다. 이름은 호텔이었지만 하루에 5만~8만원 하는 일반 모텔이었다. 채씨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또다른 모텔 건물벽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가린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컵엔 이미 다 탄 꽁초가 가득했다. 모텔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났다.
모텔방에는 싱글 침대 두 대가 있었다. 하나는 채씨가 쓰고, 하나는 로옌펑(39)씨가 쓰고 있었다. 로옌펑씨는 사망한 딸의 약혼자다. 둘은 올가을 결혼을 앞둔 상태였다. 중국 동포로 한국에 온 지 2년 된 로옌펑씨는 한국말을 못했다. 로옌펑씨는 하던 일도 중단하고 일주일 넘게 애인의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기자님을 왜 오라 했냐면. 여기 이 영상에. 얘가 내 딸이거든요. 근데 앞에 연기 때문에 얼굴이 가려지고 화면도 흐리잖아요. 이 연기를 좀 걷어내고 화면을 좀 선명하게 해서… 우리 딸 얼굴 좀 잘 나타나게 해줄 수 없을까요. 우리 딸, 마지막 살아있는 순간의 모습을 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그것만 되면 내 죽는 날까지 간직하고 살게요. 어떻게 안 되겠어요?"
채씨가 담배를 끄며 내보인 핸드폰 화면 속엔 참사 당시 공장 내부의 CCTV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채씨 핸드폰에는 똑같은 영상들이 매체별로 수십개씩 저장돼있었다.
"왜긴 왜요. 조금이라도 좋은 화질인 걸 찾으려고 안 했겠어요. 실은… 내가 딸 시신을 본 뒤로 그래요. 말도 말아요. 내가 원래 눈물을 아예 안 흘리는 사람이에요. 내 인생에서 딱 한 번 울었어요. 우리 아버지 돌아갔을 때. 어머니 돌아갔을 때도 안 울었어요. 근데 딸 시신 보자마자 울음이 확 나오는 거예요. 뼈도 얼마 안 남더라고요. 다 탔어요 시커멓게. 머리 쪽도 성하질 않았어요... 제대로 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애 엄마한테는 지금 애 못 본다고 거짓말했어요. 보면 기절해 쓰러질까 봐. 애 엄마는 엊그제 중국에서 비행기 타고 왔는데 밥도 못 먹고 종일 울기만 해요."
"노가다하며 자리잡은 한국, 딸도 돈 벌러 왔는데…"
경기도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 참사로 39세 딸을 잃은 중국동포(조선족) 채성범(73)씨가 3일 화성의 한 모텔방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났다. 오른쪽이 채씨, 왼쪽은 딸과 올가을 결혼을 앞뒀던 로옌펑(39)씨다. 둘은 화성시가 제공한 이 모텔방에서 지내고 있다.
1952년생인 채성범씨가 한국에 온 건 20년 전이다. 처음 10년간은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건물 외벽에 대리석 붙이는 일이었다. 공사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일을 그만뒀다. 그 후 경기도 안산과 시흥 지역을 다니는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10년 무사고"라고 했다.
"돈 벌려고 왔지요. 한국 오면 중국에서 버는 거랑 3~4배는 차이가 났으니까. 그땐 그랬지.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한 1.5배 정도될까… 중국에서 살 땐 젊을 적부터 트럭 기사를 했어요. 12톤 화물차. 근데 중국은 하도 일꾼이 많아서 50세만 넘어가면 일자리가 없어요. 아직 애들도 있고,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나도 53살 넘어가니까 일할 데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한국 왔죠. 한국은 거꾸로잖아요. 일자리는 많은데 일꾼이 없지요. 딸 애 죽은 공장도 다 외국인이었잖아요. 한국 사람들은 이런 공장에 안 오는 거예요.
한국 와서는 노가다부터 했어요. 나는 그래도 한국말이 돼서 수월했지요. 내가 중국 헤이룽장(흑룡강)성 가목사 출신인데, 어렸을 때 조선학교를 다녔거든요. 부모님이 그래야 한다고 해서. 소수민족이어도 지켜야 한다고. 말이 통하니까 일 잘 했죠. 근데 딱 10년 하니 죽을 뻔 하더라고요. 4층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밑에 발판이 헐거웠는가 갑자기 훅 떨어져버린 거예요. 순식간에 추락하는데 다행히 2층 발판에 걸쳐서 살았어요. 아니면 죽었지요. 그날로 관두고 버스 일 했어요."
채씨가 차츰 한국에 자리를 잡은 2010년대 초, 딸도 한국으로 건너왔다. 채씨는 딸에게 "한국이 중국보다 생활 환경이 더 좋고, 돈벌이도 더 낫다"고 했다. 채씨에게 딸은 "늦게 얻은 귀한 막내"였다.
"내가 자식이 둘인데. 큰 아들은 1979년생이고 딸 애는 1985년생이라고요. 왜 차이가 그리 나냐면, 첫애 낳을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선 아이를 하나밖에 못 낳게 했다고요. 근데 몇 년 지나니까 소수민족은 둘까지 낳아도 된다고 정책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바로 우리 딸을 낳은 거지요. 우리 딸은 중국 지린(길림)성 연길에 있는 백화점에서 일했었어요. 월급이 한국 돈으로 40만원 정도였지요. 근데 그때 한국에서 일하면 한 달에 150만원은 벌었거든요. 딸도 다 컸으니 돈이 필요하잖아요. 딸도 돈 벌러 한국 온 거죠. 13년 전이에요.
딸이랑 둘이 경기도 시흥에 방을 얻고 살았어요.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5만원. 딸도 일 많이 했어요. 아리셀 공장 다니기 전에는 시흥에서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부품 공장에 한 4년 다녔어요. 거기 계속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공장에 남자 상사가 하나 있었는데, 우리 딸을 좋아했었는가 봐요. 우리 딸이 마음에 없어서 거절을 했는데, 그 뒤로 그 남자가 우리 딸을 괴롭혔어요. 자꾸 어려운 일 시키고 힘든 일 시키고. 딸이 견디다 못해 결국 그만뒀지요. 그리고 나서 간 곳이 아리셀이었는데…"
채씨는 "억장이 터진다"고 했다. "딸이 아리셀에서 1년 넘게 일했는데 거기가 그렇게 위험한 줄 알았으면 내가 가만 있었겠느냐"고 가슴을 쳤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사고 현장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를 직접 뛰어보기도 했다. 칠순 넘은 나이였지만 7초가 걸렸다. CCTV를 다시 돌려봤다. 불이 붙은 후 30초가 지날 때까지 모두가 살아 있었다.
"우리 딸도 어려서부터 가족들한테 한국말 듣고 컸기 때문에 한국말 다 알아듣는다고요. 불이 난 순간에 누군가 '도망가'라고만 소리 쳤어도 살았을 거예요. 근데 아무도 그렇게 위험한 줄 모르고, 대피도 안 하고 소화기 붙잡고 끄고 하다가 다 죽어버린 거 아니에요. 일꾼들한테 안 알려준 거 아니에요."
"한국말 할 줄 알았던 딸, '도망쳐' 한마디면 살았을 것"
모텔방에는 옷 몇 벌과 양말 몇 켤레뿐이었다. 채씨는 사고가 난 뒤 시흥의 집으로 못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딸 생각이 나잖아요… 난 이때까지 한국이 고마웠다고요. 여기서 계속 살려고 했고. 한국은 중국보다 깨끗하고 사회 질서나 서비스도 좋거든요. 아플 때 병원 가면 중국처럼 사기 치지 않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 한국선 내 나이에도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저 고마웠지요.
시내버스 기사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어요. 일하는 날은 새벽 4시에 출근해서 막차 끝나면 밤 12시 40분이에요. 노선 한 번 도는데 4시간 걸리고 하루에 4번씩 돌아야 돼요. 운전하는 시간만 16시간인 거지요. 그렇게 월급 300만원 벌어요. 몸은 힘들어도 난 늘 고마웠어요.
근데 이제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내 자식 잃은 아픔이 한평생인데, 내가 무슨 돈을 더 벌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요? 내가 앞으로 살아야 얼마나 더 살겠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이 옆에 있어야 그게 행복이지, 안 그래요?"
그는 "오늘도 화성시청 높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는데 다들 돈 얘기뿐"이라고 했다. "그런 위험한 공장이 고용노동부 안전보건공단 위험성평가에서 3년간 '우수'를 받았다"며 "얼마나 썩어 있는 거냐"고 토로했다.
"(화성시청 사람들에게) 화가 나서 한 마디 했어요. 안전교육 했으면 우리 딸 안 죽지 않았느냐고! 제대로 조사하라고. 다시는 이런 일 발생하지 말아야 되잖아요. 이 손실이 얼마나 커요.
우리 딸이 불쌍해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한다고 나한테 웃고 했는데. 자기는 앞으로 한국에서 오래 살아서 영주권도 받을 거라고... 돈 많이 벌어서 집도 살 거라고… 나한테도 싹싹했거든요. 자기도 매일 고단할 텐데 퇴근하면 꼭 아버지 먹을 걸 사들고 왔어요. 내가 명태볶음을 좋아해서 그걸 많이 사왔거든요. 인물도, 이 봐봐요. 일하느라 힘들다고 먹어서 살이 좀 붙었어도 이 얼마나 잘났냐고요."
채씨가 핸드폰에서 딸의 생전 사진을 보여줬다. 채씨는 "이 사진을 영정으로 올리려 한다"고 했다.
채씨를 비롯한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은 열흘이 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다.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참사로 사망한 23명 노동자 중 18명이 외국인이다.
오마이뉴스 김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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