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섬으로 중화민국을 쫓아내고 대륙의 새 주인이 된 모택동은
북경을 새로운 공산중국의 수도로 정했음.
그런데 단순히 도시의 개발도로만 생각한다면 이 선택은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음.
북경이 왕조시절에는 수도였을지 몰라도
그 후 근대화를 마친 현대중국엔 이제 북경보다 더 크고 발전된 도시가 많았거든.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상해(상하이)
당시 상하이의 발전은 정말 눈부셨다고 함. 도쿄조차도 상해의 부 앞에서는 한수 접어야했고
미국에서 유행하던 재즈가 성행하던 도시이자
Shanghai swing이라는 독자적인 트렌드까지 만들어내던 국제도시
바로 이런점에서 상하이는 공산화가 된 중국의 수도가 절대 될 수 없는 곳이었음
대륙의 새 주인이 된 공산당은 자본주의 국제도시 상하이가 눈엣가시였기에 철퇴를 날렸고
상하이에 살던 금융인들과 기업가들을 추방, 숙청해버리며
한때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상하이는 몰락과 쇠퇴의 길을 걷게 됨
이 때 상하이에서 추방당한 서양 금융세력과 기업가들이 홍콩으로 몰려들며
홍콩은 한때 상하이가 가지고 있던 아시아 금융허브의 포지션을 그대로 이어받게 됨 (90년대까지도)
청나라 시절부터 이어진 국제무역항이자 제2의 도시였던 광주(광저우)
광저우를 수도로 하기엔 이 지역은 중앙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지도를 보면 북경보다 베트남, 태국이 훨씬 가까운 지역)
전통적으로 중앙에 대해 반항적인 지역이였던 반골의 동네로 찍혀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공산당과 대륙의 주인을 놓고 전쟁을 벌인 국민당의 본거지라 적합하지 않았음
제정러시아가 집중적으로 개발한 하얼빈
모택동도 처음엔 하얼빈이 새로운 공산중국의 수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했음.
그때는 현실적으로 중국 전체의 공산화는커녕 대륙을 반분이라도 하면 대박이라 생각하던 시기.
소련의 지원을 받기 편하고 만주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인프라를 가진 도시라는 점에서 합격점이었지
이런 쟁쟁한 대도시들에 비해
북경(베이징)은 낙후 되어있는 도시였음
봉건 왕조시절의 수도라 정치적으로 껄끄러움
+완전히 내륙도시+교통편도 별로란 삼박자가 안좋은 의미로 시너지를 일으켰거든.
1928년 장개석의 북벌 이후로는 과거 수도의 지위, 그리고 이름조차도 빼앗기며
원래 이름인 '북경'에서 북방을 평정했다는 의미의 '북평'으로 강제개명당한 굴욕은
인구만 많고 경제력과 도시 역량은 떨어지는,
농업위주의 낡은 도시로 쇠퇴해버린 북경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음
북경의 이러한 쇠락성과 낙후성이 오히려 공산화된 중국의 신수도로서는
공산당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음.
부르주아와 서방의 나쁜물(?)이 제대로 들어있고
기업인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그들이 지지하던 중화민국의 입김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상하이나 광저우같은 상공업 위주의 대도시들보다는
북경은 아직 전통적인 농민계층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자본가와 부르주아 계층의 발달이 다른 도시들에 비해 미약하다는 점
그리고 도시가 낙후되어 있고 아직 갖춰지지 않은 미비한 인프라가 많아서
공산당 입맛에 맞는 도시로 새롭게 개발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는
북경이 새로운 수도로 훨씬 더 적합하다고 보았던 것
그래서 유독 북경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
시가지와 문화재들을 보존했음.
물론 이렇게 지킨 문화재는 홍위병빔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