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그땐 원래 모든 게 명쾌했지만
그 날은 머리가 맑다 못해 머릿속에서 안개가 걷히고 빛이 쨍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 치른 모의고사에서 처음으로 전국권 한자리를 찍었다.
서울대 한 명 갔다고 플랭카드 올리는 지방 여고에서, 나는 교사들과 동기들에게 신이 되었다.
희망학과는 쭉 의대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과학자, 피아니스트 등속으로 장래희망을 갈아치웠지만
중학교 입학즈음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의사가 최선이라고 결론내렸다.
티비나 소설 등에서 학습했던 거 같은데,
의사는 명예도 얻고 돈도 벌고 타인에게 봉사도 되는, 그래서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직업으로 현실에서 유일할 것 같았다.
서울대 의예과에 마크를 하고 모의고사를 보면 떨어졌다고 나올 때도 있었지만
그 좁은 학교에서 '전교1등'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살던 나는 자신이 넘쳤다.
한 기수 위에서 한 성적 하던 선배 언니가 막판에 긴장해서
서울의대 대신 연대 의대에 특차에 지원해서 가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내심 비웃었다.
"집이 잘사시니 여유만만하셨구만."
가난한 집에서 서울대 합격생이 나오면 조선일보에서 기사를 실어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집에 돈이 없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돈 없어 학원도 못 다니면서 공부 잘한다는 것을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과체중에 예쁘지도 않았지만 자만심으로 넘쳤기에 예쁜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수능을 망쳤다.
모의고사 성적보다 40점 이상 낮았다.
붙어도 안가겠다며 중앙대 의대까지 세 군대를 썼지만 모두 떨어졌다.
많이 위축되진 않았다.
졸업식에서 교사들이 불쌍하게 보는 시선을 꽂을 때
아픔 비슷한 게 찔러 왔지만
다시 하면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재수생이 되면서, 나는 하루하루 시들어 갔다.
서울에 있는 유명하다는 학원에 가고 싶었다.
그 곳은 입학시험 면제해 준다는 것을 대단한 특혜인양 말했다.
처음으로 돈 없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돈 안내고 다니게 해 주는, 내가 자란 도시에서 하나 있던 학원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재수생들은 세상사에 시니컬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어른이 되었다.
내가 있는 공간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순간 사라지고
어느샌가 싸늘하고 시큰한 공기가 늘 나를 감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 기죽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차츰 내가 꿈꾸던 모습은 아닌, 그런 모습의 어른이 되어 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집중할 수 있는 뇌기능을 어느 정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수학문제만 풀면서 하루를 보내기 힘들었고 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등락이 큰 가운데 고3때보다 좀 못한 성적으로 재수시절을 끝내면서
나는 연대나 가지머, 하고 쿨한 척 하고 있었다.
중대 의대 정도면 붙을만한 수능성적표가 나왔다. (요즘하고는 대입지도가 좀 다를때다.)
고3 때와는 포스가 다른 절망이 찾아 왔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자괴감이 훨씬 컸다.
상담을 해 준다는 학원 강사가 애초에 별 기대도 안했다는 표정으로
여기 여기 여기 의대 넣어보지, 했을 때 나는 뭔가 뜨거운 게 발끈했다.
나는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고, 서울대 자연과학계열에 원서를 썼다.
내 십대를 엉덩이가 문드러지게 공부만 했는데, 세상이 내게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는 세상에 이겨보려는 마지막 발악을 하듯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외곽으로 뛰어가 버렸다.
나는 꿈을 팔아 서울대생이 되었다.
많이 배우지 못한 부모님들께는 여성 과학자가 되고 싶었노라고 둘러대었다. 부모님은 서울대라며 무작정 좋아하셨다. 힘들게 사는 부모님이 좋아하는 걸 보는 건 조금 좋았다.
별다른 의지도 없이 시작한 공부는 별다른 재미도 없었고,
나는 그냥 저냥 수업을 듣고 엠티를 가고
별로 잘 맞지도 않는 여자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신림에서 이상한 머리를 하고 동대문에서 싸구려 옷을 골랐다.
놀면서 여러가지 문화를 접하고 다닌 덕에
졸업할 즈음에는 방송이나 언론에서 일하고 싶어졌다.
전공에 별 취미가 없던 친구들이 그래도 전공이 희망이라는 듯이 대학원에 기어들어갔고,
나는 애증만 가득한 전공을 버려두고,
타대학 학생들이 많은 언론사 스터디팀에 꼈다.
자연대와는 다른 풍모의 사회대 선배가 멋있어 보였다.
그가 손을 내밀 때 얼른 잡고 그의 여친이 되었다.
그의 세다리와 함께 짧은 연애가 끝나고 나는 생전 처음 입는 충격에
스터디를 째고 마지막 학기 수업도 째고 방에 틀어박혔다.
그럭저럭 3점대를 유지하던 성적이 마지막 학기에 뚝 떨어졌다.
졸업은 되어 버리고,
재수보다 스무배 더 씁쓸한. 돈없는 백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길을 택하지 못했기에. 그토록 독립하고자 했던 부모님의 선택을 따르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따 두었던 교사자격증을 이용해 임용고시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해 본 중에 가장 지겨운 공부였다..
새로 배우는 교육학은 심리학과 연계되어 나름 재미있었지만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홀가분하게 작별을 고했던 전공들과 다시 마주쳤다.
많이 꿀꿀했던 1학년 시절에 보던 기초 책들을 다시 꺼냈을 때.
나는 내 인생 전체를 재수한다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동기가 고시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던 그 해에
나는 시험에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근소한 점수차도 아니었다.
돈을 벌어야 겠기에 기간제 교사로 들어가서 1년을 지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람도 느꼈지만, 여전히 나는 붕 떠 있었다.
사회화가 덜 된 내게 젊은 기간제 교사로서 잘 처신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중학생들과 교감하려는 노력은 삐걱되었다.
의학대학원 제도가 생겨 지금이라도 의대를 가볼까 뒤적이며, 여기저기 돈을 벌러 다니며,
방황의 꼬리를 이어가다가
'학벌이 아깝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 직장이다.
박봉이고, 여자가 애키우며 다니기는 괜찮다고 말하지는 곳이다.
내 방황과 함께 했던 긴 연애를 끝내면서, 이십대의 끝자락에 선을 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나 엘리트 되기와는 거리가 먼 여자 친구들과 한동안 어울린 덕에
나는 그 때즘 고등학교때 얼굴이 거의 안보일 정도가 되어 있었다.
미장원에 들르고 좋은 옷을 입고 나간 자리에서는
으레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자아가 형성되는 성장기에 예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예쁘지도 않던 나로서는
그 정도도 사소한 기쁨이었다.
열 몇 번째인지 셀 수 없는 어느 선에서
나는 '유달리 스펙이 좋은 남자'와 호텔 커피숍에서 냉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주선자는 그 사람의 아버지, 삼촌, 형제들의 직업과 아버지의 계좌 상태를 설명하며
'보기드문 명문가'니 잘만 되면 효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니컬해져 있던 나는 주선자의 발상에 코웃음을 치면서 또 단장을 하고 나갔다.
'유달리 스펙이 좋은 그 남자'는 좋은 직장에 다녔고 깔끔했고, 잘 웃었다.
나도 호감이 갔다.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좋다고 했다.
주선자에게 '드디어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을 만났다'고 피드백을 했다고 한다.
그는 형제들과 달리 학부를 소위 명문대가 아닌 곳에서 나왔었는데
내가 서울대를 나왔다는 것이 '지성'으로 입력 오류 처리된 게 아닌가 싶다...
결혼이란게 하려고 하니 참 금방이었다.
아담한 난초 화분들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그의 집에 인사를 갔을 때,
그의 어머니는 속치마 소리가 나는 한복을 입고 나를 살짝 안으며 맞았다
"내 며늘아기를 이제사 보는구나. 반갑다. 내 너를 많이 사랑해 주마."
김수현 드라마 같은 대사가 내 귀에 속삭여 지는 동안 나는 작은 충격에 감싸였다.
사극에 나올 것 같은 수가 화려한 같은 방석이 내밀어 졌고,
나는 방석에 앉아 아주머니 두 명이 들고오는 상을 받았다.
"제가 좀 도울까요?"
"아니다, 다음에 돕도록 하거라. 우리 아기 마음이 참 예쁘구나."
"벽에 그림이 참 좋아요."
"니가 그림을 볼 줄 아는구나. 온 세상에 저 보다 좋은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과 대화를 틀때마다 나는 드라마 세트장에 구경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들 너무 좋으시지?"
"네.. 다들 교양 있으시구.." 그에게 이렇게 답할 때 나는 나름 진심이었다.
종종 욕을 하고 특히 운전대를 잡으면 욕설이 많아지는 내 아버지나,
자기 가족만 챙기는 전형적인 아줌마 모습에 가끔은 챙피해 지는 내 어머니나,
아무리 보려고 해도 숨어 있는 2차원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내 남동생이나,
이런 내 가족들에 비해 그의 가족들은 정말 '교양 있어' 보였다.
그의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남들은 나보고 명문가에 직업 좋은 며느리 맞으라고 그러는데, 나는 처음부터 그런 거 싫었다. 여자는 남편과 가족을 잘 살피는 게 중요하지 그런게 뭐가 필요하니. 나는 일부러 그런 거 없는 집안과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특별하게 스펙 좋은 남자'와 맞선을 보게된 것이었구나..
그에게 첫 눈에 호감은 느꼈지만, 화학반응은 없었다.
매일 통화하고 자주 만났지만
호감이 가는 남자,
거기서 감정은 더 발전하지 않았다.
결혼이 다가오면서 그 감정은 불편함으로 변해갔다.
불편, 불편, 불편... 이 하루 하루 커져서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서
어디로 도망치고 싶었다.
갑자기 옛날 남자친구가 눈물나게 그립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그와 함께 가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인생이 이렇게 안 풀렸는데.. 결혼이라도 번듯하게 해보고 싶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봤잖아. 재수하면서부터 여지껏 속만 썩였잖아."
서울대 원서를 쓰던 그 밤 처럼,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내 부모님은 근래 몇 년 동안 본적이 없던 것 같은 모습으로 신바람이 나셔서
내 결혼 준비에 올인했다.
내가 적은 월급을 모아 만든 목돈은 비상금으로 가지라며,
결혼 비용은 당신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 1년 벌이도 더 되는 돈으로 시댁 취향의 결혼 예물을 샀다.
으리으리한 가게에서 돈을 쓰며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그릇과 수저를 130만원 주고 사던 날은,
고등학교 때 문제집 한권을 살까 말까 스무번 고민하다가 돌아서던 일이 떠올라 울컥했다.
부모님은 사돈에 팔촌까지 결혼식에 불렀다.
시댁에서 잡은 호텔 예식장의 밥값과 와인 값이 두당 15만원이 넘었다.
내 친구들에게는 '뭐하러 오냐' 며 말려서 머릿수를 줄였다.
결혼식날 신부 대기실에서 문틈으로 하객들이 바글거리는 것을 보며,
아버지가 노동해서 번 돈으로 저 모두에게 10만원 넘는 점심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니
부케를 든 손에 땀이 났다.
우리집 형편을 생각해서 결혼식 비용은 신랑측에서 부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거아한 상견례 식탁위에서 그런 말은 꺼내지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미리 사둔 남편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나는 친구들을 종종 집으로 불렀다.
친구들에게 나는 '예뻐져서 시집 잘간 친구'로 분류되었다.
서른이 넘어 '현실적'이 되었다는 여자들은
나의 호텔 결혼식과 아파트가 자기들의 꿈이라고 대 놓고 말했다.
이건 십 몇 년 전에 내 책상에 줄서서 수학문제를 물어볼 때와 같은 심리인걸까,
친구들을 보며 의미 없는 의문을 가져 보았다.
그들은 모른다.
아침잠을 더 자고 싶은 내가 매일 아침 꾸역꾸역 일어나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아침 밥을 지으며
매일 매일 지구 저편으로 도망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주말이면 가정부 아줌마가 퇴근하고 없는 시댁에서 내가 가정부가 된다는 걸.
요리를 꾸역꾸역 해 내어서 어마어마한 그릇들에 담아서 내어가면
내 음식이 타박 없이 먹어지는 지 종종거리는 눈치를 본다는 걸.
너무 일찍 포기해 버린 내 인생에서
남에게 얹혀 공짜로 먹고살만해진 댓가로,
나는 하루하루 벌 받는 걸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을.
대학에 떨어지고, 임용고시도 떨어지고, 의전 준비도 못하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초라하다는 것을.되돌아가는 길을 모르겠어
11년도 더지난 글인데 필력쩔고 술술 읽혀서 아직도 돌아다니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