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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고기반찬과 딸 걱정 금지 각서를 써 주셔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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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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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랑 살림을 합치기 전, 각서를 써 줘요. 그래야 엄마랑 나랑 별 탈 없이 같이 살 수 있어.”

엄마에게 각서를 써달라는 딸의 갑작스런 요구에 엄마는 기막히다는 감정을 넘어 말 없는 분노를 표현하셨다. 내가 내민 각서의 조항은 네가지였다. ① 아기에게 동물성 음식을 먹이지 않는다. ② 아기 때문에 반려동물을 가둬놓지 않는다. ③ 아기를 ‘오냐오냐’하면서 기르지 않는다. ④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사실 딸이 부모를 상대로 내미는 각서가 세상 어디에 존재할까마는, 거기에 한 술 더 떠 이 각서는 내가 봐도 엄마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에겐 정말 중요했다. 20대에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 지금 하는 이 일, 동물보호운동을 십수년간 지속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은 정말 많았고, 거기에 부모님의 걱정과 안타까움, ‘또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는 끊임없는 질문은 내게 평생 체증을 안기는 것 같아 불편하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흔두살에 결혼을 하고 마흔네살에 갑작스레 임신을 하게 됐다. 어느 날, 아기가 두살 될 때까지만이라도 네 집에 가서 애도 길러주고 집안일도 도와야겠다는, 어찌 보면 ‘청천벽력’과도 같은 제안이 불쑥 엄마로부터 던져졌고, 난 반은 좋고 반은 싫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기에 말이다. 실은 난 바쁘더라도 내 아이는 온전히 내 식대로만 기르고 싶었다. 엄마는 나의 형제들을 기르며 사랑도 듬뿍, 엄한 교육도 듬뿍 시키셨던 분이었으나, 손자에게만은 절대적으로 예외였다. 언니의 아들을 기르던 엄마의 모습은 마냥 퍼주는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였기 때문이다. 결국 엄마는 각서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한 분노’의 기간을 거쳐 우리 부부와 함께 살게 됐다. 나는 며칠 전 건강한 딸을 출산했다.

 
살림을 합치기로 해 놓고서 
무데뽀로 각서를 들이밀었지 
그러나 엄마와 함께 살아보니 
아무 말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엄마 
애 봐주겠다는데 각서를 써라? 
네가 나한테 고맙다 절을 해야지 
딸 걱정 많았는데 이젠 이해해 
너도 딸 낳았으니 겪어나 보셔

 엄마, 그때 각서 왜 안 썼어?

엄마 야! 내가 너 도와주려고 내 생활 다 포기하고 들어오는 건데 각서까지 써주랴? 너, 일만 집중해서 애고 뭐고 내가 뻔히 아는데, 네가 나한테 고맙다고 절을 해야지 각서는 무슨 잘나빠진 각서야!

실은 엄마는 내가 요구한 네가지를 모두 조용히 지켜주신다. 비건(완전채식주의)인 나와 남편은 동물의 고통 때문에 채식을 하지만, 고기의 유해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내 자식에게도 절대로 고기나 유제품을 먹일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엄마는 신생아와 동물을 같은 공간에서 기르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고정관념도 결국 버리시고 이제 거실에서 반려동물들과 아기가 같이 교감하고 호흡하고 있다. 이제 아기를 ‘오냐오냐’ 기르는 방식만 버려주시면 되는데, 그건 잘 될지 모르겠다. 벌써부터 나와 내 남편의 육아 방식이 엄마와 약간씩 마찰을 빚는 중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남은 조항 하나.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난 이것이 가장 지켜지기 힘든 약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데뽀로 엄마에게 들이밀었다. 내가 하는 일, 지금 자식을 낳아보니 그 각서 조항은 엄마에게 내밀어서도, 또 지켜질 수도 없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나를 기르면서 뭐가 제일 힘들고 섭섭했어?

엄마 힘든 건 없었어. 네가 원래 성격도 형제 셋 중에 제일 좋고 배려심 많고 이해심도 깊고 제일 수월했지. 제일 착했어. 근데 다 자란 네가 갑자기 이 일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 물론 이해는 해. 워낙 많은 사람들과 일해야 하고, 잔인한 동물 사건들 날마다 봐야 하고. 그러니 성격이 강해질 수밖에 없구나 하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렇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게 걱정도 되고. 또 어떤 때는 딸을 동물에게 빼앗겼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섭섭하고 그렇지 뭐.

 그래서 제일 걱정됐던 건 뭐야?

엄마 저런 일을 하는 애를 며느리, 아내로 받아줄 수 있을까, 그게 제일 많이 걱정됐지.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아니고. 좋은 일, 좋은 생활, 여자로서 예쁘게 가꾸며 사는 그런 일반적인 삶 다 버리고 동물에 미쳐 저렇게 된 딸이 결혼도 못 하고, 제 집 하나 장만도 못 하고, 그 흔한 보험도, 적금도 하나 들지 않고 저렇게 살다 처녀로 늙어 죽는 거 아닌가, 그게 제일 걱정됐어. 뭐, 다행히 이제 결혼은 했지만… 어쨌든 너도 자식 길러봐라. 매사 걱정이고 좌불안석이지. 내가 너한테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엄마 심정 이해할 날이 올 거다 했는데, 이제 딸을 낳았으니 한번 겪어나 보셔. 너 처음 이 일 하고 나서 얼마 안 됐을 때 방송에 네가 나왔는데 내 친구들이 전화 와서 ‘아니, 니 딸이 왜 저렇게 됐니?’ 하고 한마디씩 하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

그랬다. 그 당시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하긴 그 당시는 더더욱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을 별종 보듯 하는 시대였으니. 엄마도 그때 그랬다. “차라리 사람을 도우면 세상이 알아주기나 하지….”

 여덟살 때 고기 안 먹겠다고 했던 거, 자세히 기억나?

엄마 그래, 시장에서였잖아. 그 전에는 엄마가 “뭐 사줄까?” 하면 “고기, 고기” 이러면서 좋아하던 애가 갑자기 정육점에 걸려 있는 돼지 사체를 보더니 “엄마! 저게 뭐야?” 하고 물어봐서 내가 “저게 네가 먹는 고기야!” 하고 말했더니,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는 펑펑 울었던 거. 앞으로는 고기 안 먹을 거라고 하더니 결국 지금까지 그러는 거 아니냐. 내가 너 고기 좀 몰래 먹이느라고 고추장에 고기 갈아 넣고, 찌개에도 몰래 넣어보고 별짓을 다 해 봤지만 냄새만 맡아도 네가 뭔지 아니까. 별난 애 하나 낳아 놔서 내가 겪은 고생을 생각하면….

 그래도 남들보다 월등하게 건강하잖아.

엄마 그래, 잘났다. 그래서 네 딸도 그렇게 기를 거니? 너 몰래 먹고 다니면?

 그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내 채식 친구들의 아이들은 정말 너무너무 건강해. 생각들도 똑바르고, 성격도 참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 동물들 그냥 지나치지 않아.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 내 친한 동생의 아들이 크리스마스날 유치원에 온 산타클로스 보고 그러더래. 루돌프만 추운데 밖에 세워놓고 왜 혼자 들어오신 거냐고.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아? 측은지심이 다른 아이들보다 강한 것 같아요. 당연하지 않겠어? 작은 동물 하나의 소중함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며 자라니까. 엄마, 걱정하지 마요. 내 딸도 그렇게 되길 바라요.

 그런데 엄마. 그렇게 걱정하던 딸의 일을 이제는 이해하게 됐어?

엄마 이해 안 하면 별수 있니. 네가 고집이 좀 세야 말이지. 그러고 보니까 어느 날 문득 네 주변을 돌아보니 너 말고도 그런 사람이 많다는 거, 그런 사람들이 모여 단체가 되고, 그런 일에 사람들이 후원하고, 그게 또 텔레비전에, 신문에 날 정도로 좋은 일이라고 사람들이 말하고, 외국 사람들하고도 뭘 같이 하는 것 같고, 그러는데 뭐 내가 이해해야지. 세상이 바뀌는 거니까. 아무튼 넌 네가 도와준 그 많은 짐승들이 너 죽을 때 좋은 곳으로 끌고 갈 거다, 아무렴.

 이제 내가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엄마가 그렇게 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던 것들 다 하고 있는데 이젠 뭐 걱정은 없겠네?

엄마 그런 건 이제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렇지만 위험한 일은 이제 하지 마라. 연평도 포격, 구제역, 뭐 그런 사건들 터져 동물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내가 무슨 생각이 덜컥 드는지 아니? ‘아, 내 딸이 또 저기를 갔겠구나’ 생각해.

우리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세상에서 나와는 또다른 인생이, 이제 태어난 지 이주일 된 내 딸에게도 펼쳐질 것이다. 나도 내 딸과 앞으로 겪을 갈등 속에서 엄마가 느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걸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면 엄마처럼 반 포기 상태로 살아가게 될까. 엄마의 말대로 딸이 내 성격을 닮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 혹시 내가 이 일을 해서 엄마에게 피해를 끼친 건 없어?

 네가 유명 연예인도 아닌데 갖은 모함에 루머에 간혹가다 시달리는 거 보면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구나 생각하고, 또 어느 날 엄마에게까지 그런 안 좋은 소문이 연결될 때면 기가 막히지. 내가 너 낳을 때 잠깐 남의 집 세 산 것 말고는 줄곧 우리가 마련한 우리 집에서 살았는데, 그리고 한 10년 전 전원주택에서 용인 수지의 50평대 아파트로 이사간 거, 그거 가지고 누가 뭐라고 했다지? 참, 그 말 들었을 때 정말… 네가 그 일 한 뒤로 나한테 돈 한푼 준 적 있니? 집이 한채라도 네 이름으로 있으면 좋겠다.

더이상 엄마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인간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약자인 동물들을 좀 돕겠다는 일에 엄마에게까지 이런 피해를 끼쳤구나 싶어 더이상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우리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까지 딸의 일을 100% 이해하진 못해도 묵묵히 도와주는 우리 엄마. 그 엄마의 마음 반만이라도 엄마에게 잘해야 할 텐데. 늘 마음뿐인 내가 밉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 조금 더. 박소연 동물사랑실천협회 대표

박소연 동물사랑실천협회 대표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613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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