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인물 노재현
1926년 경상남도 마산부에서 태어났다. 창신고등학교 졸업 후 1947년에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했다. 병과는 포병이었다. 육군포병학교장, 30사단장, 육군군수사령관,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감, 육군참모차장 등을 거쳐 1972년에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1] 1975년에는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에 올랐다. 1977년 전역했고 이어서 국방장관에 올랐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국방장관 공관에 있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미8군 사령부로 도피했다. 그것까진 그렇다 쳐도 신군부 제1공수특전여단이 용산 국방부를 습격하기 직전 그곳으로 돌아와 신군부에게 잡혔다. 안전할뿐만 아니라 상황 파악과 지휘가 모두 용이한 미8군 사령부에서 실병력이 없는 국방부로 돌아온 것은 의문이다. 이러한 국방장관의 본분을 망각한 용렬한 행적이 후세에 비판받고 있다. 만약 전두환의 쿠데타가 아니고 북한의 침공이었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뛰어넘어 어마무시하였을 것이다.[2] 안전한 미8군 사령부에서 머무르며 전두환의 쿠데타 때 쿠데타를 진압하려 애쓴 장태완 장군에게 진압을 명령해 수도 인근 사단들의 지휘권을 일임하였다면 쿠데타는 진압당했을 것이다.[3] 당시는 계엄 상태로 계엄사령관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여 관리했기에 아무리 국방장관이라고 하더라도 부대 지휘권을 마음대로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전에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들에서 계엄령이 내려진 부분계엄 상태였기에 국방부 장관이 일선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다.[4] 또한 장태완 장군이 모든 진압 기회를 놓쳐버린 후에서야 연락해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사실상 무장해제하고 반란군에게 백기투항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지시를 내렸다.[5]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979년 12월 14일에 사퇴하였다. 그 후에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한국화학연구원 이사장, 한국비료공업협회장 등을 지냈다. 2019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 시신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