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카, 엄카까지는 아는데, 생카는 또 무슨 카드죠?”
‘생카’를 아느냐는 질문에 서울에 사는 직장인 김호진(45)씨는 이렇게 되물으며 “혹시 ‘생색내는 신용카드’의 줄임말인 것 아니냐”고 했다. ‘생카’는 ‘생일 카페’의 줄임말이다. 아이돌이라고는 뉴스에 나오는 비티에스(BTS)와 블랙핑크 정도 아는 김씨 같은 ‘아저씨’는 잘 모르는 개념이겠지만, 생카가 뜬 지는 좀 오래됐다. 2010년대 중후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생카는 이제 케이팝(K-POP) 세계에선 널리 퍼진 행사다.
사랑하는 연예인의 생일을 기념하는 생카는 팬덤 문화에서 꽤 큰 조각이다. 21세기 문화살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 팬들은 함께 모여 독특하고도 기발한 방식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 케이팝의 ‘엔진’으로도 불리는 팬덤 문화 속 생카의 세계로 들어가 봤다.
지난 19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에스에프(SF)9 멤버 영빈의 생카 모습. 팬들을 위해 영빈의 사진과 상징 캐릭터들로 디지인한 엠디(MD) 등을 전시해놓았다. 스튜디오 어댑터 윤동길 실장
이름난 생카, 수백~수천명 몰려
생카는 한마디로 생일을 맞은 아이돌 멤버를 위한 생일 파티다. 그러나 놀라지 말자. 정작 생일을 맞은 주인공은 생일 파티에 오지 않는다. 무슨 ‘홍철 없는 홍철팀’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정말이다.
생카는 철저히 ‘팬들의, 팬들에 의한, 팬들을 위한’ 이벤트다. 아이돌 팬들이 카페를 빌려 주인공의 사진과 엠디(MD, 머천다이즈에서 나온 말로 ‘굿즈’라고도 함)로 공간을 꾸미고 포토부스, 러키 드로(행운의 제비뽑기) 같은 이벤트를 열면서 ‘나의 최애 아이돌’의 생일을 축하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진과 몇가지 기념품이 있는 카페일 뿐인데 팬들이 오겠냐고? 실제로 이름난 생카에는 적게는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의 팬들이 몰려든다. 기획사에서 직접 기획한 생카는 인원을 수백명 단위로 제한하기도 한다. 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카를 찾는 외국인 팬도 굉장히 많다.
지난 7일 서울 마포구 합정역 주변의 한 카페에서 열린 세븐틴 멤버 ‘디에잇’(The8)의 생카에서 만난 독일 교환학생 쌍둥이 남매 핀 수에센구스(23)와 안토니아 수에센구스(23)는 열정적인 생카 순례자들이다. 쌍둥이 남매는 각각 중앙대와 숙명여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한국학을 공부하고 있는 안토니아는 세븐틴과 펜타곤의 팬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두 그룹의 생카만 가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좋아하는 엔시티(NCT) 멤버의 생카도 간다. 독일 빌레펠트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는 핀 역시 세븐틴을 가장 좋아하지만, 다른 아이돌의 생카를 찾는 것을 즐긴다.
안토니아는 “좋아하는 사람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지다. 각각 다른 카페들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즐겁다. 한국 생카에는 아이돌을 테마로 한 귀여운 굿즈들이 많다”며 “잘 살펴보면 서울 시내에서 각각 다른 생카에서 받은 대여섯개의 컵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들을 쉽게 볼 것이다. (생카 투어는) 추억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했다. 독일에서 케이팝이 점점 인기를 얻고 있어 케이팝 아이돌의 생카가 독일에서도 열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다고 한다. 핀은 “생카가 한국에서 시작됐고 이제 점차 외국으로 퍼지고 있는 상황이라, 독일에서 열리는 생카의 규모나 화려함은 한국 것과 비교하긴 어렵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세븐틴 멤버 디에잇 생카 입구에 설치된 입간판. 윤은숙 제공
“콘서트·팬미팅보다 부담 적은 놀이터”
일본인 곤도 사라(22)는 연세대 한국어어학당에서 6개월 프로그램을 마치고 곧 귀국한다. 그는 에프티(FT)아일랜드 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2016년께 케이팝에 입문하게 된 ‘2세대 한류팬’이다. 한국에서 지낸 지난 반년 동안 5차례 정도 생카를 찾았다. 일본에서 거주지인 기후현에서 도쿄까지 야간버스를 타고 어머니와 한국 아이돌 콘서트를 찾아다녔던 소녀는 이제 엑스(옛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카 등 각종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려주는 소식통이 됐다. 곤도는 “팬 활동은 힘들었던 경험을 잊게 해주는 소중한 창구였다”며 “이걸 통해 어머니와의 관계 역시 너무나 좋아졌다”고 말했다.
엑스에서 ‘ㅅㅇㄹ’로 활동하는 일본인 사오리 역시 어머니와 씨엔블루 콘서트를 함께 다녔던 2세대 한류팬이다. 이제는 에스에프(SF)9의 열혈 팬이기도 한 그는 한달에 한번꼴로 한국을 찾는다. 뮤지컬과 팬미팅을 비롯해 생카를 찾는 기쁨을 위해서다.
외국의 팬들은 케이팝을 매개로 한 국제적 친교 활동도 즐긴다. 안토니아는 “케이팝은 국제적으로 엄청나게 인기가 많아서, 개인적으로도 케이팝으로 알게 된 외국 친구들이 정말 많다. 이들에게 생카 소식 등도 알리며 온라인을 통해 소통한다”고 말했다. 곤도와 사오리 역시 인도·타이 등 다양한 나라 친구들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소통한다. 사오리는 지난 19일 서울 선릉역 주변에서 열린 한 생카에서 미국·대만·중국 친구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팬들을 한자리로 모으는 생카의 매력은 무엇일까. 많은 팬들은 생카만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를 꼽는다. 생카는 묘한 시공간이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생일을 맞은 아이돌의 사진이나 굿즈가 자리잡고 있다. 이야기가 닿는 모든 곳에 생일을 맞은 아이돌 혹은 그가 속한 그룹의 근황이 있다. 게다가 한 사람을 향한 애정만으로 시간과 공간이 가득 찬다. 어찌 보면 ‘해리 포터’ 속 마법사들에게만 보이는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팬덤을 공유하는 이들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플랫폼이다.
서울 신구초등학교 6학년 김수연(12)양은 “최애가 태어난 바로 그 시기, 최애를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생일 축하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이곳을 찾는 것 같다”며 “나도 좋지만,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기 위해 다른 그룹 멤버들의 생카에도 간다. (생카는) 어린 우리들에게 콘서트·팬미팅보다는 훨씬 더 부담이 적은 놀이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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