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의 미국은 대공황의 마지막 시기
대량 해고와 실업은 일상의 풍경이 됐고, 경기회복 정책의 하나로 미국 정부는 경마를 합법화하고 육성했음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경마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였고 로또를 사지 않아도 로또 추첨 결과를 찾아보듯, 마권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경마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고 함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말 한 마리
유난히 우수한 혈통도 아니었고, 엘리트 훈련도 받지 못했음
체격은 작고 다리는 구부정하기까지 해서 영 볼품없던 말
그러나 미국은 이 볼품없는 말에 열광했다. 누구의 어떤 말과 경주하든, 경마장을 메운 구름 관중은 그 말의 편이었다. 미국인의 마음을 훔친 말. 이 말의 이름은 ‘시비스킷’(seabiscuit)
1936년 여름 찰스 하워드와 톰 스미스가 보스턴 서포크 다운 경마장에서 찾아낼 때까지, 시비스킷에 주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함
체격 자체가 작은 데다, 심각한 저체중이어서 위풍당당해야 할 경주마 대신 짐 끄는 망아지로 종종 오해까지 받곤 했고 전설적 경주마 맨오워와 먼 친척뻘로 연결돼 있으니 혈통 자체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니었으나 경주 실적은 시원찮어서 다들 별 볼일없다 여겼는데 성적 나쁘다고 경기 혹사도 심해서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상태였다고 함
1937년 겨울, 제대로 된 조교사와 기수 그리고 마주를 만난 시비스킷은 15개 대회에 출주해 11개 대회에서 우승하고, 그중 5개 대회에서는 경기장 신기록을 세운 주목할 만한 경주마가 됨
서부는 이 새로운 스타에 열광했고 시비스킷의 출주 소식이 알려지면 수만명의 관중이 몰려들어 경마장 주변 호텔과 식당을 점령했다고함
시비스킷은 특별히 개조한 전용 객차를 타고 미 대륙을 오가며 대회에 나갔고 열차가 정거장에 멈출 때면 객차의 모습이라도 보고자 군중이 몰려들 정도였다고 전해짐
이러면 정반대의 스타가 나와야지
서부의 다크호스 시비스킷과 동부의 챔피언 워 애드미럴(War Admiral)의 단독 대결.
‘루저’ 출신 시비스킷과 딴판으로 워 애드미럴은 전형적 엘리트 경주마였고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새카만 몸과 날렵한 체격에 전설적 경주마 맨오워의 직계
워 애드미럴은 ‘완벽’했음 챔피언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이 말은 아니나 다를까 1937년 봄 미국 최고 경마대회 3경기(켄터키 더비, 볼티모어 프리크니스 스테이크스, 뉴욕 벨몬트 스테이크스) 우승을 휩쓸어 역사상 네번째로 트리플 크라운, 즉 3관마로 등극
삼관마 자체가 쉽게 나오는 게 아님
하필 시비스킷은 경기를 앞두고 기수 폴라드가 사고로 갈비뼈, 팔, 무엇보다도 한쪽 다리가 완전히 박살나 버림
폴라드의 친구이자 유능한 기수 조지 울프가 긴급히 대체 기수로 투입됐지만,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폴라드만 할 리가 없는 상황
경마꾼들은 고민 없이 워 애드미럴에게 베팅
그러나 관중들은 시비스킷의 편이었고 밑바닥에서 맨주먹으로 일궈 온 이민자들의 삶이 11월의 나뭇잎처럼 떨어져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에 화려한 혈통도, 든든한 배경도 없지만,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말에 마음을 더 줬음
오후 4시. 경기 개시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핌리코 경기장에서, 집에서, 가게에서, 공장에서, 심지어 백악관 집무실에서…. 미국 전역은 숨을 죽였다. 총알처럼 출발한 두 마리의 말은 경기장을 내달리기 시작했고 1900m를 달려 결승점을 먼저 통과한 것은 놀랍게도 시비스킷!
그것도 4 마신(말 몸의 길이) 차이로 따돌린 여유 있는 승리
흥분한 관중들은 트랙으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고함 스포츠 저널리스트 그랜트 라이스는 이 역사적 대결을 “사자의 심장과 가젤의 발을 가진 조랑말이 미국에서 가장 빠른 말임을 입증했다”고 전했음
챔피언 워 애드미럴을 이긴 시비스킷은 1938년 ‘올해의 경주마’로 선정됐다. 미국 경마 명예의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이듬해 경기 도중 시비스킷의 왼쪽 앞발 인대가 파열
시비스킷은 1940년 봄 캘리포니아 산타 아니타 핸디캡에 9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음 어떤 명마도 다섯 살이 넘어 출주하는 경우가 없고, 어떤 명마도 이 정도로 긴 공백기 후 우승하지 못했었음
거기다 한쪽 다리에 부목을 댄 폴라드가 기수였음
왼쪽 앞발을 절룩거리는 말과 한쪽 다리에 힘을 싣지 못하는 기수. 폴라드는 웅성거리는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함
“나와 시비스킷에겐 다리 넷이면 충분하다.” 7만8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둘은 결승점의 테이프를 가장 먼저 끊었고 라스트런을 승리로 마무리했다고 함
https://youtu.be/9w5-1BhP6w0?si=5v2liroB2cw8Q5PV
이 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