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뒤풀이 회식을 하는 자리. 어김없이 술잔 돌리기가 시작됐다. 연구원 노수진(31ㆍ가명)씨는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열 명이 술잔 하나를 십여 번 돌렸을까, 갑자기 노씨 옆자리에 앉아있던 A씨가 황급히 화장실에 뛰어갔다. 다시 돌아온 A씨에게서 나는 비릿한 냄새를 맡자마자 노씨는 그가 속을 게워내고 왔다는 걸 직감했다. 그런데 A씨는 돌아오자마자 또 같은 잔으로 술을 마신 뒤 노씨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노씨는 순간 ‘싫다고 말하고 욕먹은 뒤 끝낼까’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B형 간염 때문에 더 이상 쓰면 안되겠어요”라며 상황을 넘겼다. 물론 B형 간염이 술잔 돌리기로 전염된다는 통념은 사실과 다르지만, 아직까지는 고정관념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같은 수법이 잘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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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전통
같은 찌개를 먹는 것이 위생적으로 좋지 않은 건 알겠지만 마음 한 켠엔 ‘그래도 정을 나누는 고유의 전통인데’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보글보글 끓는 떡볶이에 숟가락을 찔러 먹던 우정 어린 추억은 대부분 갖고 있지 않은가.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씨에 따르면 그러나 이런 식문화가 꼭 ‘전통’인 건 아니다. 황씨는 “조선시대에는 독상을 두고 제각각 자신만의 밥상으로 먹었으며, 이는 평민들의 삶 까지도 적용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남녀유별ㆍ장유유서 등 유교식 생활질서가 식탁에까지 적용됐다는 것이다.
독상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 말부터다. 당시 총독부는 물자를 아끼자는 이유로 겸상을 장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위한 공출로 실제 식기가 부족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론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면서 냄비 하나를 두고 통째로 먹는 게 일상이 됐다. 이후 같은 식탁, 같은 반찬을 공유하는 문화가 우리의 오랜 전통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같이 먹자, 마음으로도
같은 반찬을 먹는 것이 유구한 전통은 아니라고 하니 꼭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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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https://hankookilbo.com/News/Read/2018012115796046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