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우의 죽음 - 219년 11월
유비의 칭제 - 221년 4월
이릉 전투 - 221년 7월 ~ 222년 8월
당시 촉이 세운 대전략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천하삼분지계를 실현하고, 오나라와 화합하여 위나라를 친다
관우의 죽음 + 형주 상실로 천하삼분지계는 깨졌고, 익주 하나만으로 위나라 정복이 불가능하다는건
40년 가까이 전쟁터에서 구르면서 잔뼈가 굵은 유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
관우의 죽음을 차치하고서라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선 형주란 땅은 필수불가결한 곳이었음
익주의 최전방이 한중에서 나가는 군이 주공이 된다면, 형주에서 움직이는 군사들은 어그로를 끌어 위나라의 군대를 묶어줄 수 있기 때문
실제로 관우가 죽기 직전 일으켰던 양번 공격은 유비의 한중 공방전과 맞물려서 이루어졌고, 몇달 뒤 조조가 급사했기 때문에
전쟁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역사적 흐름은 크게 뒤바뀌었을지도 몰랐을 일임.
관우가 군을 일으켰을 때와 비슷한 시기에 위나라 내부 곳곳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거든.
이후 제갈량의 북벌 때 상용(형주의 서북부)을 들어다 바친 맹달을 제갈량이 엄청나게 신경쓴것도 같은 이유임.
맹달이 어그로를 끌어 준다면, 한중에서 출발하는 북벌군으로 옹양(지금의 장안 지역)을 홀라당 하는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관우의 죽음과 이릉대전 발발까지는 2년 가까이 되는 긴 공백이 있음.
아무리 피가 끓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죽음으로 인해 분노하기엔 2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다.
결국 관우의 죽음은 명분일 뿐, 촉이라는 나라가 계속 생존하고 건국의 대의명분을 찾기 위해서 형주의 재탈환은 필수였다는 것.
만일에 대비해 이릉대전에 반대하는 2인자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하고 후방에 남겨서 나라를 지키게 하고,
조운은 한중과 형주 양 방향으로 언제든지 이동가능한 강주(지금의 충칭)에 배치해서 유사시 위의 침입이나 유비의 구원에 대한 안배를 함.
당시 한중 태수였던 위연도 차출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혹시 모를 위나라의 침입을 대비하게 시켰음.
게다가 관우 참살의 총사령관이었던 오나라의 여몽은 이미 죽고 없는데다 그 이후의 대도독라인은 끊겨 있는 상황.
우리야 결과론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보고 있지만 유비 입장에서는 본인과 장비가 가면 충분히 해볼만하다고 느꼈을 상황이었음
장비가 연의에서는 술 좋아하고 머리 나쁜 근육돼지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관우와 동렬에 오를 만큼 지략에도 능한 만능형 사령관으로 전장에서 활약했거든
문제는 정벌 준비 중에 장비가 갑자기 암살을 당했다는 것과,
오나라에서 대도독으로 내세운 더벅머리 서생인(유비 입장에서 봤을 때) 육손이라는 인물이 오나라 역대급 명장이었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