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염혜란은 “너무 파격적인 캐릭터라 우려도 있었지만, 나이 든 노인이 장총을 들고 나타난다는 게 새롭고 신선했다”며 “보편성을 잃지 않는 수준에서 비틀어진 모성애를 드러내 동조와 비난을 함께 받고 싶었다”고 했다.
염혜란은 토막 난 채 발견된 시신이 아들 ‘주오남’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하며 “내 아들만 아니면 됐지”라고 말한다. 그는 ‘김경자’를 잘 표현한 대사로 꼽았다.
“내 자식이 귀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편협한 모성을 보여준 장면이라 생각해요. 김경자는 왜곡된 모성을 품고 있는 인물이죠. ‘김경자‘를 모성으로만 풀면 모든 게 너무 쉬워 보여서 그걸 경계하려 했어요. 모성애도 일부 있지만 그녀의 세대, 삶, 종교가 모든 면에서 편협하기에 시선과 생각이 비틀어지게 된 거라 생각했죠.”

극중에서 그는 걸쭉한 목포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전남 여수 출신인 그는 “목포와 여수 사투리는 다르다”며 “‘그랬어라우’는 목포 사투리이지 여수에선 잘 안 쓴다. 목포 분을 모셔놓고 단어들을 다 고증받았다”고 말했다.

2시간에 이르는 특수분장은 그의 연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내 연기의 반은 분장이 했다”고 말할 정도다. 초등학생 딸을 둔 젊은 김경자부터 할머니 김경자까지 연기한 그는 “내 나이대 김경자를 연기할 땐 따로 분장을 안 해도 되겠다 했는데 막상 분장을 받고 보니 ‘김경자’라는 마스크를 쓴 듯한 기분과 자유로움이 느껴졌다”고 돌아봤다.
“처음엔 분장팀이 너무 고생을 하길래 실제 이 나이에 맞는 노년배우가 연기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촬영을 하는 순간 ‘이건 안되겠다’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젊은 배우가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부의 김경자와 3부의 김경자는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달라요. 그냥 늙어가기만을 기다린 사람이 아니라 13년을 갈고 닦은 노인인데 장총 들 힘은 있어야 했죠. 계속 체력을 유지하고 있던 노인으로 분배를 하며 연기했어요.”
‘김모미’를 연기한 이한별, 나나, 고현정까지 매력이 다른 세 배우를 만나는 즐거움도 컸다. 염혜란은 “다양한 모미를 만나는 재미는 있었다”며 “각각의 모미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달라지고 상대에 따라 대사도 바뀌더라”고 했다.
특히 고현정과 육탄전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김모미는 젓갈창고에 갇혀 있던 딸 미모를 구하기 위해 김경자와 마지막 혈투를 벌인다.
“고현정 선배님과 첫 신이 육탄전이어서 부담감이 컸지만 몸을 정말 불사르더라고요. ‘김경자’는 모든 게 발산되고 채워지지만, 김모미는 에너지를 덜어내요. 현장에서 ‘나른한 카리스마’라 부를 정도로 등장만으로 집중하게 하는 내공이 느껴졌어요. 워낙 대선배님이시지만 저를 좀 더 막대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늘 응원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감사했어요.”
아들 주오남 역의 안재홍 얘기가 나오자 “당신의 행보를 축복하고 최고의 배우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극찬했다.
“사실 안재홍이란 배우가 여러 시도 끝에 ‘멜로가 체질’로 ‘댄디남’ ‘도시남’으로 거듭났는데, 그럼에도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서 ‘주오남’이란 캐릭터를 과감히 선택한다는 것이… 배우로서 정말 매력적이고 그 어떤 모습보다 훌륭한 모습이라고 봐요. (안재홍이) 문자로 ‘다음엔 남매로 만나고 싶다’고 하길래 제가 ‘무슨 소리냐, 난 연상연하 커플 생각하고 있는데’ 했어요. 함께 합을 맞출 수 있어 정말 행복했고 시청자 입장에서도 뿌듯했습니다.”

1999년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염혜란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 드라마 ‘도깨비’(2016), ‘동백꽃 필 무렵’(2019), ‘라이브’(2018), ‘경이로운 소문’ 시리즈(2020·2023) 등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며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올해는 ‘더글로리’의 강현남과 ‘마스크걸’의 김경자를 통해 ‘넷플릭스의 얼굴’이 됐다. ‘마스크걸’ 역시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톱10 TV 부문(비영어) 2위에 오른데 이어 2주차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정상을 찍는 흥행 화력을 보이고 있다.
염혜란은 넷플릭스의 딸이라는 반응이 있다고 하자 “굿즈는 많이 받는다”고 너스레를 떨며 “진짜 복인 것 같다. 시대를 잘 만난 것 같다”고 웃었다.
“과거엔 개성이 없으니 살을 찌우라, 애매한 얼굴이란 말도 들었어요. 제가 가지지 못한 외모적인 부분을 부러워하기도 했죠. 어느 순간 한계를 인정하고 이런 평범함이 주는 강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줌마라는 한 단어로 이 연령대의 여성을 퉁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런 편견도 싫어요. 아줌마도 너무 전형적으로 보여서 그렇지 엄청난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더 멋진 아줌마, 많은 전사를 가지고 있는 아줌마들을 연기하고 싶어요.”
변신과 연기에 대한 쏟아지는 찬사에도 “제 힘이 아닌 글의 힘”이라고 공을 돌렸다. “아무 것도 없는 글에서 연기를 만들어 낼 순 없다”며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언어로 쓴 대본이 있었고, 이런 배역을 맡은 것도 행운”이라고 얘기했다.
“지금이 정점이겠거니 봉우리 끝이겠지란 생각은 안해요. 그냥 길을 걸어가는 것일 뿐이죠. 흘러가는 거죠. ‘전성기’니 그런 기사들 보면 마음에 많이 담아두려 하지 않아요. 연극을 배우면서 ‘남의 말로 하지 말고 너의 말로 하라’는 가르침이 제일 도움이 됐어요. 나로 출발해서 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단 것도 연극에서 처음 배웠어요.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삶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지점도 있어요. 슬픔에 빠져있을 때도 구렁텅이 수렁으로 갈 때도 ‘이 수렁을 기억하자’ ‘언젠가 쓰이겠지’ 극한의 고통도 자양분이 될 수 있다 생각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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