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개봉하여 천만관객 몰이로 흥행 신드롬이 되었던 <왕의 남자>(감독 이준익)는 조선 초기 연산조의 정치적 상황 속에 광대라는 인물을 묘하게 섞어넣어 만든 매우 빼어난 팩션 작품이다. 공길(이준기 분)의 마성적 매력과 장생(감우성 분)의 예술혼, 그리고 광대들의 공연 장면은 시종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영화는 공길이 궁중에 발탁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 임금 연산군과 공길 그리고 장생 3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장생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연산군과 공길은 실존인물이다. 연산군이야 파란만장하고 괴팍한 인생사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캐릭터인 공길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연산군, 광대 이름 외울 정도로 관심 많아
배우 공길(孔吉)이 노유희(늙은 선비를 흉내 내는 풍자극)를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堯)·순(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논어》를 외워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하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공길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 11년 12월 29일자 실록에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실제 공길은 영화 속 공길과는 성격이 판이하다. 영화 속 공길은 여자를 뺨칠 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광대로서의 끼와 재능은 누구보다 탁월하지만 여리여리하고 소극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그러나 실록상의 공길은 임금 앞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꽤나 배포 큰 남자로 보인다. 영화 속 캐릭터로 보자면 장생이 이에 더 가깝다.
신분적으로 미천한 위치에 있던 광대가 실록에 이름을 남긴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하지만 연산군이 예술적 취향이 남다르던 임금인 까닭에 연산조의 실록에는 광대 관련 내용이 종종 나온다.
연산군은 은손이라는 광대가 죽은 후 그를 이어받은 중산이란 자의 실력을 걱정하거나 공결이란 광대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는 등 광대 개개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궁중행사의 외연적인 형식에나 관심을 가지던 다른 왕들에 비해 연산군은 이름을 꿰고 있을 정도로 광대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왕의 이러한 관심은 미천한 신분의 광대도 당시 인격을 갖춘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게 만들었다. 연산군은 공길의 입바른 충고에 바로 칼을 휘둘러 죽이지 않고 유배라는 점잖고 소극적인 벌을 내렸다. 연산군 당시 많은 선비가 바른말을 하다가 사화로 죽음을 당하던 것에 비해 광대에 대한 연산군의 처벌은 오히려 인간적이다.
공길과 연산, 영화처럼 현실에서도 남다른 관계
조선시대 광대들은 매우 미천한 위치에 있었지만 나례(儺禮)에 동원되어 공연을 하는 중요한 예인이었다. 나례는 원래 연초에 하는 국가적인 액막이 행사인데, 중국 사신들을 영접할 때나 왕의 개인적인 연회 등에서도 행해졌다. 이 나례 행사에는 전국에서 실력 있는 광대들이 불려나왔다. 그러니 영화 속 공길의 궁중 연행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실력만 있다면 왕 앞에서 얼마든지 공연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공길은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남사당패였다. 그런데 이 남사당은 조선 말기에 형성된 집단으로 조선 전기에는 아직 이런 성격을 띤 광대패가 없었다.
물론 통일신라시대부터 유랑예능인 집단은 있었다. 이 집단은 고려시대에는 양수척·재인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떠돌면서 공연을 하고 때로는 도축을 해주고 밥을 빌어먹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렇게 산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의 토착민이 아니라 8~9세기경 북방에서 들어온 유목민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여진족이 많았지만 그중에는 타타르인도 있었다. 그들은 저 멀리 이슬람 문화권에서 전파된 묘기를 공연했는데 줄타기, 입으로 불 뿜기, 접시 돌리기, 가면극 등이 동서를 막론하고 서커스의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결성 때문이다.
공길에게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타타르인의 피가 섞여 있다면 영화 속 주인공 이준기처럼 수려하고 당당한 풍채를 가졌고, 왕 앞에서 단독공연을 할 정도로 총애받는 예인이었을 것이다.
영화처럼 연산군과 공길 사이에 묘한 감정이 섞여 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연산군 말기 왕의 실정에 풍자로나마 직언하고자 한 공길에게서 왕을 염려하는 마음도 느껴진다. 연산군은 이 공길의 사건으로 크게 화를 내며 그토록 좋아하던 나례 자체를 없애버린다. 이를 볼 때 공길은 연산군에게 심정적으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공길의 충언 이후 연산군은 1년도 채 되지 못해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