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개 국어 능동, 동양인 최초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정치경제학 전공,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
일제 강점기 최고의 엘리트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한 여성의 비참한 최후를 조명한다.
최영숙은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창엽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농사를 정리하고 포목상을 차려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최영숙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총명하여
일곱 살에 여주보통학교에 입학해 열한 살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중등학교는 14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에 3년을 집에서 보냈다.
14세 되던 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다.
부모는 여자가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면 그만이므로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허락을 얻어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방년 22세 된 최영숙 양은 지난 7월13일 밤 하얼빈에서 구아연락열차를 타고 멀리 스웨덴을 향하여 떠났다.
최영숙의 부친이 포목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곤 하나 딸의 유학비를 감당할 만큼 부유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떠나기 직전, 그의 부친은 명태 무역에 손을 댔다가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부친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해 여주를 떠나 서울 홍파동 빈민가로 이주했다.
난징 유학 시절 최영숙은 집에서 얼마간 학비를 타 쓰기도 했지만,
스웨덴에서는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고, 난징에서 한두 달 버틸 수 있는 돈을 가져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자수를 놓아 생계를 이어가던 최영숙은 1927년 스톡홀룸 대학에 동양인으로서, 조선인으로 최초의 여성유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유학당시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 능통하며 스웨덴어까지 할 줄 알고 학구열이 왕성하여
스웨덴 아돌프 황태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고 한다.
이에 황태자 도서실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하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1930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듬해 1월,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길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시찰하기로 마음먹었다. 모자라는 돈은 도중에 벌기로 했다

친부모 못지않게 그를 아끼던 스웨덴 유력인사는 최영숙과 작별하면서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 전보를 치라”고 당부했다.
최영숙은 자신이 저금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호의를 완곡히 사절했다.
유력인사는 대신 최영숙에게 여행의 편의를 부탁하는 내용의 소개장을 써주었다.
덴마크,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를 두루 구경하고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스웨덴 유력인사의 소개장 덕분에 가는 곳마다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집트에서 인도로 마지막 여정을 가능 동안 그녀는 인도청년 '미스터 로' 와 만나게 되었다.
최영숙은 인도의 뜨거운 기후와 긴 여독으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는데
병원비는 미스터로가 대신 치렀다.
최영숙의 부모는 집을 잡혀서라도 여비를 보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영숙이가 혹시 사고라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애타는 마음에 백방으로 뛰어다녀 가까스로 300원을 마련했다.
돈보다 배표가 빨리 간다기에 아무 생각 없이 배표를 사서 보내게 되는데돈 대신 배표를 받아든 최영숙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탄다 해도 오는 도중에 음식 사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낯선 거리를 방황하던 최영숙은 하는 수 없이 미스터 로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미스터 로는 우선 자기 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했다.
얼마 후 최영숙은 기독교여성청년회에서 일어 교사 자리를 얻었다.

그러는 동안 최영숙과 미스터 로는 서로 인격을 존경하고 학식을 숭배하는 연인이 되어 결혼신고까지 마쳤다.
사랑의 선물로 뱃속에 아이까지 생겼다.
그러나 최영숙은 영원히 인도에서 살 수는 없었다.
결혼한 지 석 달이 못 된 어떤 날, 최영숙은 남편에게 귀국할 뜻을 전했고...
남편은 그녀의 뜻을 존중해 '1년에 한번씩으로 오라' 며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귀국길에 오른 최영숙은 1931년 말, 동양인 최초로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사를 전공한, 그리고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사로서 금의환양했다.
당시 언론들은 보기 드문 여성 엘리트 최영숙의 귀국소식을 대서특필하며 그녀의 귀국을 반겼다.
그녀 역시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신장을 위해 뜻을 펼치고자 했다.

남편을 인도에 두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최영숙은 우선 직업을 얻어 가정부터 정리해놓고,
인도로 돌아가 살든지 아니면 남편을 불러 조선에서 살든지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귀국하고 보니 집안 형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첫째동생 최영선은 여자상업학교를 마치고 출가하고, 둘째동생 최복정이 이화여고보를 마치고 여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부모와 정신병을 앓는 오빠를 부양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학사학위’까지 받은
최영숙이 귀국만 하면 집안 형편이 한순간에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경제학적 지식과 유학경험및 5개국어 구사능력으로 대학교수, 교사. 기자등의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최영숙은 누구에게도 경제적 곤란을 말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얼마간 도와주려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다른 사람에게 구구하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신조 때문이었다.

생활이 이렇듯 어려웠지만, 사회를 위한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낙원동 여자소비조합이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손해를 입을 줄 알면서도 자금을 변통해 인수했다.
임신한 몸으로 취직자리 알아보랴, ‘콩나물장사’하랴, ‘공민독본’ 편찬하랴 백방으로 뛰어다니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영양실조, 소화불량, 임신중독이 차례로 찾아왔고 급기야 각기병까지 걸려 두 다리가 부어올랐다.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며 5개월을 지내자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최영숙은 실신해 동대문부인병원에 입원했다.
사랑의 결실을 낙태 수술로 지웠고,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홍파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4월23일 오전 11시, 최영숙은 2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집은 빈한하고 당장 매장할 준비조차 없다.
여사의 평생 동지였던 임효정 여사가 장례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편이다.
육십 된 노부모가 망극하여 통곡하는 광경은 실로 쓸쓸하다.”(조선일보, 1932년 4월25일)
4월25일 최영숙은 영면할 묏자리 한 평 구하지 못해 홍제원 화장장에서 재가 되었다.

미스터 로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최영숙은 세상을 달관한 듯
“돈! 돈! 나는 돈의 철학을 알았소이다”고 썼다.
그러나 편지를 부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슴 아픈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영숙이 세상을 떠난 지 며칠 후,
미스터 로로부터 여비를 보내니 인도로 돌아오라는 편지가 왔다.....

최영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스웨덴에서 살기가 고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 비하면 스웨덴은 천국이었다.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스웨덴은 나의 제2 고향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외국인 대접을 극진하게 합니다.
더욱이 나는 동양 여자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후대를 한몸에 받았더랬어요.
아이들과 여성들이 자유롭고 힘 있게 뻗어나가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특히 연초 전매국이나 성냥공장 같은 데서 노동하는 여공들까지도 정신상으로나 경제상으로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정말이지 부러웠습니다.
그들에겐 일정한 노동시간과 휴가가 있을 뿐 아니라 임금도 넉넉해 생활비를 빼고도 반은 남습니다.
그들은 노동복만 벗어놓으면 유복한 숙녀들입니다.
더욱이 체육을 즐겨 날마다의 사는 재미가 더없이 호강스러워 보였습니다.”(동아일보, 1931년 11월29일자)

최영숙이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사회과학을 공부해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은 까닭이었다.
최영숙은 귀국 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조선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살아 있는 과학인 경제학을 현실에서 실천해 보려했습니다.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노동운동을 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에 취직이 걱정입니다.
스웨덴에 있을 때, 그 나라 신문에 투고하여 조선을 다소 소개도 해보았고, 동무 중에도 신문기자가 많았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선의 실정을 아는 데도 제일일까 합니다.”(조선일보, 1931년 12월22일자)
